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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지붕뚫고 하이킥

지붕킥, 하이킥 VS 터미네이터

 

지붕킥, 하이킥 VS 터미네이터


http://movie.daum.net/tv/detail/photo/view.do?tvProgramId=54547&photoId=508091&order=default


단기간의 시간으로는 사회의 변화는 잘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장기간의 시간으로는 그 변화는 분명하게 느껴진다. 어제와 오늘은 별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사실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와 2000년대 사이의 변화는 변화라고 하기보다는 완전한 교체로 보일 정도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어제와 오늘 별 변화를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면서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변화가 느껴지는 현상 말이다. 아마도 조금씩 누적되는 변화들이 나중에는 근본적인 변화를 나타나게 하는 모양이다. 또한 과거가되었을 때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모양이다.  


사실 최근의 사회적인 변화는 단기간의 시간으로도 그 변화를 실감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사회의 변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기술의 변화가 사회적인 변화를 실감나게 해준다. 컴퓨터의 발전을 생각해 보면 더욱 실감이 날 것이다. 또한 전화기-페이저-휴대폰-아이폰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변화는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를 상기시켜준다. 그런데 과학기술 변화의 속도만큼은 느끼지는 못하지만 결국 그 과학 기술의 변화라는 것은 인간 의식의 산물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인간 의식의 변화야 말로 사회 변화의 결정적인 요소이다. 사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 의식의 산물이고 보면 인간 의식의 변화 속도가 사실상 과학기술의 변화 속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이러한 중요한 인간의 의식이 바람직하지 않게 나아가면서 궁극적으로 인간에 의해 제어되지 못한다면 인류는 어떻게 될까? 결국 이것은 과학 기술에까지 영향을 미쳐 파국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SF 영화들이 주로 이러한 제어되지 않는 인간의 의식, 즉 과학 기술의 파괴적인 모습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터미네이터> 연작은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인간 의식에 대한 부단한 자기 성찰이 없다면 인간은 정말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말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cafe.daum.net/SuperBlackBird/FYv3/2084?docid=QP2P|FYv3|2084|20090203191221


그런데 그 스케일에서만 차이가 날뿐 <지붕 뚫고 하이킥> 또한 인간의식의 여러 측면을 다양하게 보여준다는 면에서 <터미네이터>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터미네이터>나 <지붕 뚫고 하이킥>을 달리 볼 필요는 없다. <터미네이터>가 과학기술 발달의 부정적인 부작용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지붕 뚫고 하이킥>은 스케일이 작고 일상적인 삶을 다루고 있지만 인간 의식을 풍자적이고 해학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보는 인간의 다양한 의식의 모습들을 보면서 <터미네이터>에서 느끼는 슬픔까지도 느낄 수 있다.


아직 파괴적인 의식은 아니지만 그 속에는 파괴성의 맹아가 싹트고 있는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지금 우리의 모습은 파괴적인 의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변화를 두드러지게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의식들은 우리 사회의 변화를 보여주고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회를 보여주고 반영하는 방식이 다양할 수 있다. 리얼할 수 있으며, 풍자적이고 해학적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에나 현실에 대한 작가의 의식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보면 사회에 대한 작가의 태도나 의식에 달려 있다.<터미네이터>가 리얼하다면 <지붕 뚫고 하이킥>은 풍자적이고 해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은 대단히 풍자적이고 해학적이다. <터미네이터> 처럼 직접적인 충격을 받을 수도 있지만 <지붕 뚫고 하이킥>처럼 풍자와 해학을 통해 의식적인 완고함이나 문제를 완화시킬 수 있는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세경의 눈물이 그런 것이다. 지훈이 정음을 포근하게 안는 모습이 그런 것이다. 보석의 절망이 그런 것이다. 사회의 변화에 대한 예리한 풍자와 해학이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단기간의 시간 속에서는 우리가 그것을 예리하게 인식하기가 어렵다. 실천하기도 어렵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가치는 시간이 좀 흐르고 나면 더욱 두드러지지 않을까 싶다. 무릎을 칠 정도로 말이다. 아니 하이킥을 찰 정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