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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신데렐라언니

신데렐라 언니, 송강숙은 효선에게 다시 돌아올까?


 

신데렐라 언니, 송강숙은 다시 돌아올까?




16회에서 송강숙이 떠나버렸다. 기차 역사에 홀로 남겨진 효선이 "엄마" 라고 부르짖으며 끝이 났다. 이 송강숙의 떠남은 그녀가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의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을 던져 주었다. 송강숙은 과연 돌아올까? 만약 송강숙이 돌아온다면 어떤 계기로 인해서 일까?


송강숙이 떠난 것은 드라마의 내적인 필연성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다. 필자가 이전의 포스트에서 송강숙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언급했었다. 송강숙이 떠난 것은 이 죽음이라는 추측과 깊은 관련이 있다. 죽음은 송강숙의 떠남의 강한 은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송강숙은 결코 개성도가에 남아 있을 수가 없다. 떠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송강숙이 단지 속물적인 인간으로 남아있다면 뻔뻔스럽게도 대성도가에 남아 온갖 뻔뻔스러운 짓은 다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구대성의 일기를 통해 송강숙은 자신의 삶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된다. 이런 변화가 송강숙을 내면적으로 뒤흔들고 있다면 송강숙이 대성도가를 떠나야 할 수 밖에 없다. 그녀가 불행으로 빠트린 대성도가에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또 그 일기를 읽게 된 효선이 그녀의 모든 과거를 안 이상 더 이상 효선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송강숙은 결코 대성도가로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것일까? 돌아 올 수 없다가 정답이다. 송강숙은 결코 대성도가로 돌아 올 수 없다.


그러나 송강숙이 돌아 올 수밖에 없는 어떤 충격적인 일이 대성도가에서 일어난다면 송강숙은 돌아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송강숙을 불러들일 수 있는 충격적인 일이란 무엇일까? 혹 그 충격적인 일이란 것이 죽음(꼭 죽음이 아니라도 극단적인 상황)과 관계된 일일까? 실로 궁금하다.


우선은 송강숙 자신의 죽음일 수가 있다. 송강숙 자신이 죽어 다시 대성도가로 돌아오는 시나리오이다. 이것은 상당한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송강숙의 죽음은 다양한 은유로 작용하면서 드라마 내용의 완결성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본다. 송강숙이 구대성의 일기를 읽고 침묵 속에서 허공을 오랜 시간동안 응시하는 장면을 그 죽음의 복선으로 떠올릴 수 있다. 또한 죽은 구대성과의 참된 화해를 죽음으로 보여줄 수도 있다. 물론 송강숙 자신의 궁극적인 변화의 은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송강숙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건강하게 버젓이 살고 있는 송강숙을 죽이려면 고난이도의 설득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과연 송강숙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시청자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 만큼 당위성이 있을까가 핵심이다.


둘째는, 은조의 죽음이다. 송강숙에게 은조의 죽음이야 말로 충격일 것이다. 송강숙이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송강숙은 은조에게 너무나도 깊은 상처를 심어주었다. 속물적인 송강숙과 사색적(또는 지적이고 냉소적)인 은조의 갈등과 화해는 이 드라마에서 관통되고 있는 일관된 주제들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주제는 확대와 변주의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눈여겨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송강숙은 사실 은조와의 화해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단지 딸이라는 이유로 반항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만 했을 뿐이다. 송강숙이 떠나고 다시는 대성 참도가를 찾지 않는다면 이렇게 상처를 준 은조와의 화해는 불가능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은조가 죽는 것은 어떤가? 송강숙을 불러들이기에 엄청난 충격인 동시에 죽은 은조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은조의 죽음이야 말로 구대성과 효선, 그리고 송강숙이 진지하게 화해할 수 있는 매개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효선의 죽음이다. 현재 드라마의 내용상 효선의 죽음에 상당한 복선이 깔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훈으로부터의 충격, 아버지 구대성의 죽음으로부터의 충격, 송강숙과 은조로부터의 충격이 겹쳐서 나타나고 있다. 효선이 미각을 상실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물리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상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미각의 상실이란 생존본능의 상실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극단적으로는 죽음을 상징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효선이 죽는다면 송강숙이 돌아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송강숙이 마지막 효선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떠나보낸다면 그 죄책감은 참기 힘들기 때문이다.


넷째로 준수의 죽음이다. 준수의 죽음은 좀 더 쉽게 처리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어린아이라서 말이다. 심한 장난을 치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그런 사소한 실수도 가능한 아이이다. 이 준수의 죽음은 송강숙에게는 엄청난 충격일 것이다. 그러나 준수의 죽음은 내용상 그 개연성이 상당히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갈등의 당사자도 아닌데다가 순진무구한 아이를 송강숙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죽게 하는 충격요법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너무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돌아와 본들 갈등은 고스란히 남아있을 뿐이고 말이다. 준수는 대성도가의 미래를 상징하는 새싹의 의미로 존재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준수의 건강한 성장은 갈등으로 얼룩진 대상도가의 모든 갈등들이 해소되었다는 상징으로 말이다.


다섯째, 16회에서 송강숙이 영원히 떠났다는 생각이 잘못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송강숙은 어떤 이유로 만신창이가 되어 효선에게 돌아 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다시 돌아온 송강숙이 효선과 다시 만나는 것도 그다지 어색하지도 않을 것 같다. 글쓴이 개인적으로는 16회가 송강숙의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구차하게 송강숙이 다시 돌아와 눈물을 뿌려대는 것보다 그렇게 사라져간 송강숙이 훨씬 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층격적인 사건으로서 죽음들을 언급했다. 물론 죽음 만일 이유는 없다. 죽음이 아니더라도 어떤 충격이 송강숙을 부르게 될지도 무척이나 궁금하다. 하지만 그런 충격적인 사실들을 지레 짐작하여 다 나열하는 것은 작가나 연출가에 대한 무례가 아닐까 싶다. 열린 결말으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마저도 결말의 한 종류이고 보면 이러쿵저러쿵 오버이지 싶다. <신데렐라 언니>는 글쓴이의 이런 무례한 예측조차 참으로 불합리하고 억지스럽게만 느껴지게 하는 예측불허의 내용이기에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개인의 취향>과는 달리, <신데렐라언니>는 드라마로서의 질적인 완결성을 보여주고 있어 너무 기쁘다. <신데렐라언니>에 찬사를 보낸다.


이미지 출처: http://www.artsnews.co.kr/news/787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