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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신데렐라언니

신언니, 송강숙은 왜 효선을 두려워할까?



신언니, 송강숙은 왜 효선을 두려워할까?




송강숙은 하느님, 부처님과 맞짱을 뜬 여자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런데 송강숙은 효선이 두려워진다. 애송이에 불과한 효선이가 두려워진다. 벗어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송강숙의 삶으로 판단해 보건데 효선은 그녀가 살아온 거친 남자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은 순수한 존재이다. 이미 송강숙의 남자 중에 하나인 장씨를 보아서도 그녀가 얼마나 모질게 살아 왔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은조의 삶 자체가 이것을 추측하게 한다. 은조의 삶에 각인된 송강숙은 얼마나 저주스러웠던가? 그런 송강숙이 효선이가 귀신처럼 무섭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대성도가, 아니 구대성을 유혹할 때의 그 송강숙을 생각해 보면 효선이 하나쯤 처리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구대성도 죽었고, 효선이가 본 일기장은 깨끗하게 태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구대성 사이에 자식도 있겠다, 그야말로 송강숙의 세상인 것이다. 효선이 하나쯤 정신병자로 몰아간다고 한 들 대수롭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송강숙은 효선이 너무 두려운 것이다. 가장 안정적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송강숙은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송강숙의 두려움의 정체는 자신의 삶에 대한 어렴풋한 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살아온 삶에 대한 자각인 것이고 구대성에 대한 죄스러움인 것이다. 그러니 송강숙은 효선의 분노에 두려워지는 것이다. 송강숙이 효선을 두려워하는 것은 은조에 비해서는 많이 늦다. 이미 시청자들은 은조가 죽은 구대성의 영정 앞에서 아빠라고 부르던 그 모습과 효선이 구대성의 분신처럼 느끼며 두려워하던 모습, 그리고 엄마 송강숙에게 달려가 대성도가를 떠나야 한다며 벌벌 떨던 그 모습을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다. 은조는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이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있는 자신과 자신의 엄마 송강숙에 대해 깊은 혐오감과 분노, 아니 이러한 감정들을 초월한 그 이상의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은조처럼, 송강숙이 속물이긴 하지만 그녀의 깊은 마음 한 구석에는 그래도 인간의 얌심이 남아 있는 것이다. 구대성의 일기가 그런 송강숙의 마음을 뒤집어 놓았다. 그 일기의 내용을 읽어가면서 그녀가 과연 인간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 자기 삶에 대한 혐오의 감정들이 몰려왔을 것이다. 송강숙이 구대성의 일기장을 보고 앉아있는 모습은 참으로 역동적인 모습이었다. 침묵이었지만 송강숙의 마음속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자기 연민, 혐오, 부끄러움, 분노 같은 감정들이 뒤섞여 소용돌이 쳤을 것이다. 침묵은 그저 침묵이 아닌 것이다.


효선에 대한 송강숙의 두려움의 실체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것이 단순히 자신의 과거의 남자나 삶이 밝혀지리라는 그런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두려움인 것이다. 즉, 속물인 그녀를 끝까지 믿고 사랑해준 바보같은 구대성에 대한 죄스러운 감정인 것이다. 구대성을 통해 세상이 달라져 보이는 것이다. 인간들이 달라져 보이는 것이다. 하느님, 부처도 두렵지 않던 그 안하무인의 송강숙이 겨우 효선이 두려워지는 것이다. 송강숙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 변화가 침묵 속이었지만 대단히 역동적이었던 것이다. 이미숙의 연기력에 상당히 덕본 측면이 있다. 효선이 구대성의 일기장을 읽었다는 것은 단순히 부끄러운 자신의 삶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구대성을 파멸시켰다는 바로 그 사실을 읽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짓을 효선이 읽어버린 것이다. 송강숙이 그토록 죄스러워 하던 그 부분을 효선이 읽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송강숙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하느님, 부처님보다도 효선이 두려워진 것이다.


송강숙이 이 두려움에서 어떻게 벗어나게 될 지 무척 궁금하다. 효선이 또 송강숙을 용서해 줄지도 초미의 관심사이다. 이런 와중에 은조의 역할이 어떻게 개입되어 관계를 형성해 나갈지도 무척 궁금하다. 변화가 시작된 송강숙 저 바닥 밑까지 철저하게 변화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