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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신데렐라언니

신언니, 바보같은 효선의 복수 구대성을 닮았다?

 

신언니, 구대성이 살아난 바보같은 효선의 복수?




효선이 송강숙과 함께 어딘가로 떠났다. 바로 구대성을 괴롭힌 그래서 죽음의 한 이유에 속할 수 있는 장택근을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효선과 송강숙의 이 동행은 일종의 살풀이 같은 것이었다. 송강숙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도, 장택근을 원망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아빠 구대성을 위해 딸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 때문이었다. 바보 같은 아버지를 대신한 바보 같은 효선의 복수라고 해도 될 듯싶다. 진실의 확인이라고 해도 될 듯 싶다. 장택근을 만난 효선은 장택근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송강숙의 진실도 알게 되었다. 그랬기에 송강숙이 떠난 기차의 역사에서 목놓아 '엄마' 라고 부르며 통곡하는 것이다. 


15, 16회에서 구대성의 일기를 읽은 효선이 송강숙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다. 하지만 애증이 뒤섞인 감정의 혼란에 불과했다. 효선은 천성적으로, 구대성으로부터 물려받은 피의 한계로 송강숙을 철저하게 증오할 수 없다. 그런 아버지에 그런 딸일 수밖에 없다. 송강숙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을 읽었기에 더욱 그렇다. 송강숙이 저주스럽지만 동시에 그마저도 사랑한 아버지였기에 효선은 더욱 슬프다. 효선 또한 그랬다. 구대성의 죽음과 함께 냉대를 받기 시작했다. 송강숙의 그 모든 위선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꿋꿋하게 참았다. 왜 모녀는 이렇게 바보스러울까?


15회에서 떠나려는 송강숙을 잡으려고 맨발로 달리는 효선의 모습과 도망가려는 송강숙과 잡으려는 효선이 함께 나뒹구는 모습은 꼭 그랬어야 하는가의 아쉬움이 없지 않다. 지금껏 침묵으로도 역동성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기에 그런 엽기적인 행동은 의외로 다가왔다. 오히려 침묵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대성의 일기를 읽고 침묵속에서 앉아있던 송강숙의 모습은 얼마나 역동적이었던가? 아마도 송강숙이 효선을 엎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너무 작위적으로 만든 부분처럼 보인다. 송강숙은 아무도 모르게 챙길 것 챙겨서 야반도주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교통편이 문제였을까?



아무튼 엽기적인 행동이었지만 구대성- 송강숙 - 효선- 장택근(송강숙의 남자들)의 관계들을 묘하게 표현하는 것이라 참 의미가 있는 장면이었다. 비정한 사내들의 욕지거리와 폭력이 아니라 바보같은 효선이 두려워 진 것이다. 이제 송강숙이 두려워진 존재는 효선, 아니 자신인 것이다. 구대성에게, 효선에게 찍혀있는 자신의 흔적에 참을 수가 없어진 것이다. 그녀가 지은 죄악이 너무 두려웠던 것이다. 송강숙에게 이러한 행동은 내면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송강숙이 발악적으로 달아나고자 한 이유는 바로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속물적이고 위선적인 자신으로 달아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송강숙을 효선이 잡는다. 이 효선의 행동에는 애증이 뒤섞여 있다. 너무나 바보 같게도 말이다. 도대체 송강숙을 붙잡아서 무엇하려고. 송강숙이 떠나는 것을 구대성이 두려워했듯이 그렇게 자신의 아버지처럼 효선이 송강숙을 붙잡으려 했을까? 그러니 송강숙을 잡은 것은 죽은 아버지 구대성과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그녀의 복수라는 것이 바보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구대성의 전철을 밟는 것 말이다. 다르다면 구대성이 자신의 본심을 일기장에 비밀로 적어 놓았다면 효선은 송강숙에게 드러내는 것의 차이인 것이다. 즉, 효선의 복수라는 것이 구대성의 마음이 일상에서 드러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 효선의 복수는 구대성 만큼이나 송강숙에 대한 애증으로 뒤섞여 있는 것이다.


그러니 송강숙에게 이 효선의 바보스러운 복수만큼 두려운 것이 어디에 있을까? 송강숙은 효선의 모습에서 구대성을 보기에 진실로 부끄럽고 두려움으로 떨게 되며 달아나게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