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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신데렐라언니

신데렐라언니, 송강숙에 드리워진 운명의 그림자?



신데렐라언니, 송강숙의 변화가 중요한 이유?



드라마 <신데렐라언니>는 관계와 소통, 그리고 상처와 치유의 이야기이다. 상처라는 일면에 초점을 맞출 때, 상처의 근원에 송강숙이 자리 잡고 있다. 은조의 상처, 효선의 상처. 죽은 구대성의 상처, 이 모두가 송강숙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연이 아니다. 상처를 입히는 원인이 치유가 되면 상처가 아물게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 상식을 그대로 이 드라마에 적용을 해보면 송강숙의 정신이 치유가 되면 은조, 효선, 그리고 하늘에서의 구대성의 상처가 아물게 되는 것이다.


은조의 내면적인 모습은 이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부분이다. 소통이 부재하며 상처 받은 은조의 모습은 그 상처가 얼마나 절절하고 깊은 지를 알게 한다. 양심과 엄마라는 혈육 사이에서 내상을 입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은조의 내면도 본다. 이 은조의 내면을 통해 인간이 처하게 되는 상황과 그로 인해 생기는 상처와 아픔, 답답한 마음을 보편적으로 느끼게 된다. "은조가 얼마가 아플가? 송강숙은 왜 저렇게 불쌍할까?" 이러한 감정이 보는 이들의 내면으로 침잠될 때 바로 예술의 감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효선도 마찬가지이다. 효선의 상처도 은조만큼이나 깊고 아프다. 은조처럼 양심의 문제가 관련되는 그러한 상처는 아니다. 효선의 상처는 송강숙의 돌변에 있다. 아빠 구대성이 죽고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송강숙의 돌변은 효선을 밑도 없는 외로움의 나락으로 빠트린다. 물론 여기에는 기훈과의 관계도 존재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외로움이다. 자기 주위의 사람들, 은조와 기훈이 자신에게 등을 돌린 것 같은 외로움에서 어디 하소연하기도 어려운 고통을 받는다. 효선이 이러한 외로움을 참기란 참 어렵다. 바로 이 효선의 상처와  외로움의 근원에 송강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은조의 내면 깊숙이에 자리 잡고 있는 상처의 근원이나 효선의 외로움의 근원에는 송강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를 더 추가해보자면, 살아있던 때의 구대성의 내면 풍경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은조, 효선, 그리고 죽은 대성의 상처 원인인 송강숙에게서 어떤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면 은조나 효선의 상처는 나날이 깊어져 가기만 할 것이다. 여기에서 송강숙의 변화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13회, 14회를 보면서 송강숙의 변화가 미묘하게 느껴지고 있다. 특히 13회에서, 생뚱맞지만 구대성의 일기장을 찾아 일기의 진실한 내용을 접하면서 송강숙은 감동받은 것 같다. 14회에서는 감동의 열기가 더 강력해졌다. 송강숙의 변화는 은조, 효선, 그리고 죽은 구대성에게만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의미가 깊다. 바로 송강숙이 변화해야만 은조, 효선, 죽은 구대성의 근원적인 상처가 치유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서, 만약 송강숙이 변하지 않는다면 은조의 상처는 아물기가 어려울 것이다. 결국 시간에게나 맡길 수밖에. 효선도 마찬가지이다. 송강숙이 근본적으로 변해야만 은조-송강숙, 효선-송강숙의 관계들이 복구되고 회복될 것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효선이 구대성의 일기장을 보고 송강숙의 정체를 알게 된 것 같으니 문제가 더욱 복잡해 질 듯 하다. 마치 송강숙에 드리워진 운명의 그림자 같다.


첫번째 이미지: http://www.artsnews.co.kr/news/77504
두번째 이미지:http://www.artsnews.co.kr/news/776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