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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신데렐라언니

신언니, 은조에게 아빠로서 구대성의 진정한 의미는?



신데렐라 언니, 은조에게 아빠로서 구대성의 진정한 의미는?




구대성의 죽음은 참 가슴이 아프다. 이 구대성의 죽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드라마를 보는 시각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해석들 가운데 필자는 이전의 포스트에서 전통과 관련하여 <전통의 죽음>이라고 좀 과장된 해석을 한 바 있다(신데렐라언니, 구대성의 죽음이 어이없는 자살인 이유?). 이걸 너무 아전인수격의 해석이라고 하더라도 비난은 달게 감수하겠다. 아무튼 이 전통의 죽음이란 관점에서 보면 구대성이 살아있던 때의 대성도가와 사후의 대성도가는 그 성격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전통의 죽음이라고 하였으니 대성도가는 더 이상 전통의 힘으로 운영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징후들은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은조이다. 은조는 미생물을 전공하고 효소를 연구하는 대성도가 연구실에 소속되어 있다. 물론 연구만이 아니라 마켓팅이나 판매쪽에도 힘을 기울이곤 한다. 10회에서 구대성이 죽고 회사의 운명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은조는 실의에 빠져있는 대성도가의 직원들에게 일을 하라고 독려한다. 그리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월급을 꼬박꼬박 주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일하지 않으려면 나가라는 식으로 말을 한다. 


이러한 은조의 태도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에서는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전통이라는 관점에서는 타당하지 못한 말이다. 직원들은 월급 때문에 수십년을 대성도가를 떠나지 않고 구대성과 함께 막걸리를 지켜온 것이 아니다. 또한 일을 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대성의 죽음 때문에 실의에 빠져 있었을 수도 있으며, 또 그들의 항변 그대로 일이 없기 때문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을 막무가내로 나가라는 식은 전통에 대한 인식이 얕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아직 젊고 유능한 과학도이며, 구대성의 대성도가를 살리겠다는 절박한 염원에서 한 행동이고 말이겠지만 전통을 너무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구대성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대성도가의 직원들을 하루 아침에 내몰겠다는 것은 의도와는 무관하게 구대성과 대성도가의 전통을 너무나도 무시하는 처사인 것이다. 은조는 기훈의 말을 한 번쯤은 되새겨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또 은조는 자신이 연구한 표준화된 효모를 가지고 빗은 술 맛을 효선이 보게 한다. 구대성이 빗은 막걸리 맛과 똑같다는 말을 효선에게 듣자 (그것이 술의 전부인 냥) 그 단지를 들고 구대성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대성도가 곳곳을 걸으며 구대성에게 보여주려는의미있는 발걸음을 한 뒤 구대성의 사무실로 들어가 영정 앞에 단지를 놓고 흐느낀다. 그리고 아빠, 아빠 라고 부르짓는다. 이러한 은조의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가슴이 아프고 슬프다. 드라마를 보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장면에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구대성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핵심축을 이루는 장면이 되리라고 본다. 이것은 은조의 가슴에 송강숙이라는 속물적인 엄마와 구대성이라는 정신적인 아빠(신데렐라 언니, 생물학적 엄마 vs 정신적인 아빠)가 존재하면서 은조의 행동이나 사고에 영향을 미칠 것을 예고한다. 즉, 은조의 내면 갈등의 중요한 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은조의 모습이 아무리 감동적이고 슬프다고 해도  무언가 허전한 것은 은조가 대성도가의 저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전의 태도와 관련해서 볼때 마치 자신이 연구한 효모가 모든 전통의 맛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태도이다. 이건 가능하지도 않다. 드라마상으로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으로 묘사되고 표현된다고 해도 은조의 이 방식은 전통을 앗아가버리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전통의 현대화라고 이해하지 못할 부분도 아니지만 사실상 전통은 사라지는 것이다. 즉 제조 과정이 표준화되고 기계화 되면서 전통적인 과정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은조가 대성도가의 직원들에게 나가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러한 표준화를 통한 기계화 때문이라는 오해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은조가 연구한 효모가 대성도가를 살리는데는 큰 기여를 하게 되겠지만 전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통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송강숙이 대성도가의 부엌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을 내쫓으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즉, 합리적이고 이성적일 지는 몰라도 전통을 약화시키는고 인간의 정을 부정해버리는 것이다. 은조의 행동 동기와 송강숙의 그것은 전혀 성격이 다르지만 그 결과를 놓고 볼 때는 동일한 것이다. 아무튼 은조는 송강숙과는 너무 달라도 다르니 앞으로의 기대도 다르다. 


은조가 대성도가를 다시 살리려면 대성도가의 저력의 원천을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연구한 효모가 대성도가를 살릴 수 있다고 해도 효모를 연구한 열의 만큼이나 대성도가가 축척해온 전통에도 열의를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직원들이든 술을 빗는 과정이든 말이다. 

은조에 대한 이러한 지적은 현재의 부족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변화를 위한 것이다. 아직은 부족하고 어설픈 걸음이지만 은조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한다. 은조가 구대성을 늦었지만 아빠, 아빠하고 부르짓은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시작과 함께, 은조의 가슴속에 구대성이 아빠로서 자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구대성을 아빠, 아빠 라고 부른 은조의 변화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