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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신데렐라언니

신데렐라 언니, 은조의 공범의식과 분노?



신데렐라 언니, 은조의 공범의식과 묵인에 대한 분노?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어야 한다면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아마 남자와 여자로 나누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악한자와 선한자들로 무리하게 나누려고 할런지도 모르겠다. 자식과 부모는 어떤가?


나눈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다. 그건 어딘가 틈이 엿보이고 하나가 될 수 없을 것 같고 괜히 언짢아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나눌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아야 하고 그랬으면 좋겠다. 과학의 분석이나 분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하나를 있는 그대로 볼 수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너무나 불행하게도 하나인 것임에도 언제나 분리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 있다.  아이와 어른이다. 세상의 모든 어른들은 아이의 시기를 거친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어른들은 아이였다는 사실을 떼어놓고는 성장을 말할 수 없고 현재를 말할 수 없다.  과거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불행한 것은 하나의 존재가 금이 가면서 아이와 어른으로 분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잊는다. 하나의 인간 속에서도 하나가 되지 못하며, 아이와 어른이라는 둘의 존재도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세상에 가장 소통의 부재가 바로 아이와 어른의 관계가 아닐까 싶다.


아이들의 불행은 바로 그렇게 아이들을 잊는 어른들 때문에 생겨난다. 상처받는 영혼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은조는 상처받은 영혼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그녀의 엄마 송강숙에 의해 잃어버렸다. 어린시절을 잃어버린 은조는 불행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한 존재의 반쪽을 잃어버린 셈이다. 은조는 참담하다. 엄마없는 하늘 아래에서 살고 싶어한다. 엄마는 곧 자신 속의 아이를 강탈해버린 잔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역겨운 엄마와 살아간다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그러나 은조는 그런 엄마와 함께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는 엄마의 곁을 떠나갈 것이지만  지금 여기에서가 아니라는데 언제나 앞으로만이다. 가슴이 아프다. 수많은 '지금' 과 '여기'를 거쳐왔겠지만 은조는 여전히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녀가 떠나게 될 날이 빨리 다가올 수 있을까? 언제쯤이 될까?


이렇게 여전히 무기력하게 엄마와 함께 있다는 사실은 은조를 공범의식에 시달리게 한다. 변한 것 없이 뻔뻔하게 살아가고 있는 엄마의 그 짓거리를 보면서도 함게 살고있다는 것은 공범이 아니고 무엇인가? 엄마를 떠난 다는 것은 엄마의 죄악을 보지 않는 것이다. 보지 않는다면 묵인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8년 동안이나 떠나지 못한 채 자신의 어린시절을 타살해 버린 엄마의 그 위악을 묵인해야 하다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녀는 자시의 묵인에 분노가 이는 것이다. 은조에게 차디찬 분노만이 남아있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은조' 에게서 어린 시절을 빼앗아버린 엄마라는 존재는 참 모순의 존재이다. 엄마이기에 또 미칠지경이다. 함께 살아오면서도 죽음이 함께 한 삶인 것이다. 말은 사랑이다. 딸을 위한 엄마의 사랑이라지만 감수성 예민한 어린 시절의 은조에게는 그 사랑이라는 것이 증오로 바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너에게 사랑이 나에겐 증오가 될 수 있는 건 서로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이와 어른은 더욱 그렇다. 그렇게 아이와 어른은 하나이면서도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소통 부재의 독립된  인격체가 되어 버린다. 인간은 분열적인 존재이다. 그런 분열적인 인간이 만든 세상 또한 분열적일 수 밖에 없다.


엄마와의 공범의식과 그것에 대한 묵인, 그리고 자유 앞에서의 무기력에 은조의 분노는 새로운 배출구를 찾고자 한다. 자신의 엄마인 강숙, 기훈, 정우? 효선? 아니면 일? 그 배출구가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첫번째이미지: http://osen.mt.co.kr/news/view.html?gid=C1004160003
두번째 이미지: 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0041608025501735&outlink=2&SV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