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칠미네이터 칠숙이 우리에게 주는 5가지 교훈



칠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아마 사람들 마다 그 평가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평가가 다르다 하더라도 평가의 가장 결정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미실의 몰락일 것이다. 역사는 몰락한 자들의 편에는 서지 않는다. 역사는 승자 중심의 기록일 수밖에 없고 후대의 사람들은 그 기록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아무리 드라마가 당대의 인간들의 진실을 추구하였다고 해도 결국 승자가 독식했던 역사의 프리즘을 통해 볼 수밖에 없기에 <선덕여왕> 드라마 자체가 그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미 그 배역들의 이미지에 그러한 한계들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미생이나, 칠숙이 그렇다. 미생류의 인물 설정이 이미 간교하고 사악한 어떤 느낌을 갖게 한다. 칠숙의 강인한 인상도 또한 그렇다. 그러나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미생과는 달리 칠숙은 상당히 예외적인 존재로 강한 인상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칠숙은 눈물까지도 자아내고, 동정하게도 되고, 심지어 사랑하는 캐릭터가 되어갔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처음부터 선한 인상을 가진 문노와는 다른 인상이었다. 이런 칠숙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칠숙은 훌륭한 장수라는 사실이다. 당대의 국선인 문노와 막상막하의 무재를 겨룬 장수이다. 이런 위치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막연히 미실에 아부나 하여 오른 자리가 아니라 실력을 쌓아 올라간 자리라는 뜻이다. 즉, 칠숙의 연륜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전장에서 공을 세워 존경의 대상이 된 것이다. 몰락한 미실의 장수라는 면에서 과소평가된 측면이 있다면 그의 무재는 더욱 탁월할 것이다. 칠숙의 이러하 측면을 우리는 드라마 이면에서 추측할 수 있다.

교훈 1

오늘날 우리는 너무 조급증에 빠져있다. 결과지상주의에 함몰해 있는 듯하다. 결과 못지않게 과정도 중요하다. 너무 판에 박은 듯한 말이라 식상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르다. 훌륭한 장수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고 어려운 과정을 통해 연단되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진득함이 있었으면 좋겠다. 화려하게 드러난 것들, 이를테면, 좋은 학벌과 명예과 재력과 권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생과 봉사를 묵묵하게 실천하는 사람들이 대접을 받는 사회가 되었으며 좋겠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9/11/15/0200000000AKR20091115033400005.HTML?did=1179m


첫째로 칠숙은 충신이라는 사실이다. 칠숙은 유신랑과 비담에 의해 삶을 마감하기까지 <선덕여왕> 내내 미실에게 충성했다. 미실이 승리자였다면 당연히 칠숙은 미실의 충신이 아니라 신라의 충신으로 기록될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격랑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충신이 역적이 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칠숙의 경우 그 연기의 압권은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덕만과 소화를 쫓는 장면일 것이다. 그가 얼마나 집요한 사내인가를 알 수 있다. 정말 집요했다. 아마도 칠미네이터라는 별칭이 붙여진 것도 이런 집요함 때문일 것이다. 소화의 칼에 찔리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추위와 모래 바람을 겪어야 하는 그 어려움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의 집요함은 곧 미실에 대한 충성인 것이다. 이 모든 고난의 중심에 바로 미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칠숙은 미실의 사람이기 보다 신라의 충신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


교훈 2

칠숙의 충성됨은 특히 우리의 정치인들에게 타산지석의 교훈이 될 만하다. 물론 민주주의 시대인 오늘날은 그 충성의 대상이 미실이라는 한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이 되어야 한다. 사욕 추구를 위해 국민을 기만하는 위선적인 정치인에 대한 경고로 읽힐 수 있다. 정치라는 큰 차원만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돈과 치정에 의해 친구사이의 우정이 깨어지고 부부사이의 신뢰가 깨어지는 것을 얼마나 많이 목격하고 있는가. 칠숙과 같은 충절을 바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신의는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신뢰할 수 있는 사회가 행복한 사회요, 선진국이 아닐까 한다.


셋째로 칠숙은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란 사실이다. 경지에 오른 무사들이 그렇듯이 칠숙은 그의 검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칠숙이 검의 오랜 수행을 통해 훌륭한 인격을 연마했음을 알 수 있다. 칠숙이 악역에 걸맞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 칠숙이란 배역을 그렇게 인상파로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훌륭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 이런 위인은 어디에도 흔치 않다.


교훈 3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를 그리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개인적인 판단으로 지나친 학벌에 대한 집착이 아닐까 한다. 즉, 사람의 됨됨이보다 학벌을 우선시 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훌륭한 인격은 개인의 노력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사회 구조가 많은 영향을 끼친다. 결과 보다 과정을 존중하고, 창의성을 길러주며, 정직한 사회라면 그러한 사회에서 훌륭한 인격들이 더 많이 만들어 지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다. 우리사회는 너무 건조한 사막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삭막해져 버렸다. 얼마전 있었던 해군 군납품 비리 양심선언 사건에서 보듯 정직한 사람이 오히려 집단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현실인 것이다. 필자는 그 원인을 찾아 대안을 마련할 만한 능력이 되지 못한다. 단지 이러한 문제를 개인들 한 사람 한사람들이 자각하면서 훌륭한 인격들이 만들어 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가자는 기본적인 생각에서 이런 언급을 하고 있다.

http://ent.jknews.co.kr/article/news/20091116/7145076.htm


넷째 마음 깊이 따뜻한 사내라는 사실이다. 미실의 명에 따라 물불 가리지 않는 칠미네이터이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따뜻한 감정이 충만해 있다는 사실이다. 소화에 대한 애정을 통해 우리는 칠숙의 마음이 참 따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이것은 비정한 무의 세계에서 언제나 품어왔던 칠숙의 감정일지도 모른다. 미실의 명을 어기려 한 것은 바로 소화 때문이었다. 그의 사내로서의 감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다.

 

교훈 4

이 점에서는 2가지의 큰 이견이 충돌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전통적인 정 문화에 대한 옹호와 오늘날의 현실과 충돌하는 전통의 고루함에 대한 지적일 수 있다. 이 두 가지의 주장은 타당하고 설득력이 있다. 예를 들면 가족내의 가부장적인 권위가 질서라는 측면에서 장점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반면에 억압적인 구조라는 단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것은 칼의 양 날과 같은 문제이다. 칠숙은 미실과 소화 중에 둘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선다. 이것은 이성과 본능의 갈등이랄 수 있다. 칠숙은 철저하게 본능을 억압하고 만다. 소화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애정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실수로 소화를 자기의 손으로 죽이고 나서 소화를 안고 흐느끼는 칠숙의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비록 애절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소화에 대한 사랑은 깊고도 깊었다. 우리의 전통은 본능적인 감정을 억압하는 문화였다. 아무리 깊고 간절한 마음이라도 표현은 자제했다. 이렇게 두 가지 이견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시사하는 의미도 달라진다. 가슴 깊이 진실을 담아두는 속깊음을 배울 수 있으며, 동시에 가부장적인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타산지석으로 배울 수 있다.


다섯째로 사람을 판단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칠숙과 관련이 없다. 칠숙의 배역을 인상파 배우인 안강길씨가 맡은 것은 장단점이 있을 것이지만, 필자의 사견으로는 퍽이나 인상 깊다는 생각이다. 그의 인상이 인상 깊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사회가 너무나도 맹목적으로 생각하는 미에 대한 기준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칠숙의 외관과는 달리 그는 대단히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훌륭한 장수이며, 미실의 입장에서 보면 충신이며,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이다. 얼마 전 미수다 루저 발언이 시끄러웠다. 사람의 키로 인간을 평가하는 그야말로 천박한 인식이었다. 그것은 무언의 관행이었을 수 있다. 키가 은연중에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자제했어야 했다. 우리 사회의 미에 대한 맹목적이고 다소는 천박한 인식을 보는 것만 같아 씁쓸할 뿐이다. 키는 인간의 본래적인 신체상의 특징이다. 남자고 여자고 키가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루저 발언 어쩌고 하는 식은 키 큰 인간의 안하무인식 발언이다. 인간의 현실을 철저하게 무시한 경솔한 발언이다. 사실 더 심각한 것이 성형수술이다. 이 성형수술은 인간을 인조인간으로 만드는 짓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모두 루저였기에 위너의 길을 선택했다는 말인가? 조금 있으면 개나 소나 다 성형수술을 시킬지도 모르겠다.


교훈 5

지금 우리는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 같다. 연예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외모에 투자되는 돈과 시간, 그리고 물자가 엄청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외모에 신경을 써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얼굴의 뼈를 깎아 갸름하게 만들고, 가슴에 무언가를 집어넣어 가슴을 두드러지게 하고, 얼굴의 살을 당겨 피부를 탱탱하게 하는 짓은 문제가 있는 일이 아닐까? 아무리 가치관의 차이에 따른 문제라고 하지만, 천박하게만 여겨진다. 어떤 고상한 핑계를 단다고 해도 말이다. 칠숙이 못생긴 외모라고 하면 화를 낼까? 개성있는 얼굴이라고 하면 될까? 아무튼 잘생긴 얼굴은 아니다. 칠숙의 진면모를 판단하는 것은 결코 외모가 아니다. 키도 아니다. 칠숙의 진면목은 이미 위에서 다 언급을 했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꾸준한 노력과 과정에 대한 충실함과 속 깊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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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걸어서 하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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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또웃음 2009.11.19 16: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칠숙도 석품도 자신의 주군에겐 일편단심 충신이었죠.
    석품도 멋있었습니다. 너무 드러나지 않아 안타까워요. ^^

  2. Joa. 2009.11.19 18: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를 보면서 이렇게 배울거리를 잘 찾아내시다니 놀라워요 : )
    뭐든 깊이있게 보시는듯 ㅎㅎ

  3. 태아는 소우주 2009.11.19 2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름다운 공간에
    새롭게 오게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돌고 있는 저 생쥐가 주는 느낌은...
    아마도 대단한 인연을 만난 듯한 기분이 드네요.
    영화는 당연히 출연하시겠어요.
    영광입니다.

  4. 2009.11.19 2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걸어서 하늘까지 2009.11.20 17: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ㅎㅎㅎ 정신 연령은 아직 20대죠^^;;
      전 님 블로그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그렇네요, 기억력이 좋지 않구서는 그런 포스트 아무나 할 수 없죠~~^^ 님도 언제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5. 핑구야 날자 2009.11.19 22: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칠미네이터...ㅋㅋㅋ 잘 읽고 갑니다... 교훈을 명심해야할 사람들이 이 글을 봐야 하는데,,,,

  6. 하록킴 2009.11.21 0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칠순역할 사실 이름도 모르겠네요^^;그러나 그동안 영화와 드라마에서 자주 보덕 익숙한 배우죠.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비호감 배우라고 생각했지만,정말 매력넘치는 배우 같습니다.선덕여왕에서의
    칠순역도 상당히 좋았고요^^저도 저런 남자가 사나이가 되고 싶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