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훈, 싸이 보도 이젠 자제해야!

김장훈과 싸이의 관계가 연일 도마 위에 오르면서 그들의 관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다. 최근 싸이의 인기나 김장훈의 국가적인 선행으로 보아서는 이 둘의 관계가 이렇게 좋지 않게 보도되는 것이 불편하기만 하다. 둘 다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연예인들이고 보면 이들의 관계 악화는 마음을 무겁게 하기도 한다. 인간관계란 잘 될 수도 있고 틀어질 수도 있는 것이기에 그들의 관계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이라고 어찌 예외일수만 하겠는가?



그런데 최근의 언론 보도는 너무 시끄럽게 이들을 보도하고 있다. 본인들에게 맡길 문제를 언론이란 이유로 마치 싸움을 붙이는 듯한 모양새다. 정신이 없을 정도로 김장훈-싸이의 관계 문제를 가십거리로 쉽게 다루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정작 본인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고 시간이 약인 경우가 많다. 조용히 시간을 기다리면서 지켜보는 여유가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하루가 멀다하고 떠들썩하게 보도를 하고 있으니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다.

 


이미지출처: http://news.sportsseoul.com/read/entertain/1089801.htm


 

사실 이렇게 시끄러운 언론보도에도 불구하고 김장훈과 싸이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든 문제가 무엇인지도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막연한 추측만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실체가 불분명한 문제를 가지고 무슨 사골 우려내듯이 우려내고 있다. 그저 변죽만 울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라면 차라리 보도를 자제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이래저래 언론이 하고 있는 것은 김장훈의 말대로 '언론플레이' 라는 느낌이다. 자극적인 보도만 해대면서 정작 알아야 할 내용이나 문제의 객관적인 사실 보도는 전무한 상태이다. 그저 김장훈의 SNS 글을 바탕으로 추측성 기사를 내놓고 있는 것이다. 싸이가 8시간 김장훈 병문안을 했다느니, 화해를 했다느니 하는 추측성 보도만 난무했다. 정작 김장훈의 입에서는 부정적인 말들이 나왔다. 이렇게 국민들만 혼란시키고 당사자들을 피곤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정론지라 자부하는 신문들이나 방송들도 이런 추측성 보도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이제는 김장훈-싸이 관계에 대한 보도는 자제하면 좋겠다. 그들도 현명하게 처리하리라 믿는다. 조용히 기다리면서 지켜보는 것도 때론 언론이 해야 할 성숙한 태도이다. 입게 거품을 물며 생각 없이 내뱉는 것 보다 차분히 기다리면서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고 사명이다. 시간이 지난 뒤에라도 그 때는 지나간 사건들을 사실에 바탕 해서 보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부부의 이혼 문제를 언론이 생중계 하듯이 보도하면 그게 바른 태도일까? 김장훈-싸이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관계란 제 3자들이 끼어들면 해결하기가 더욱 힘들게 된다. 개인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해서 마치 생중계를 하듯이 떠들어대기보다는 당사자들이 문제를 현명하게 처리하고 해결 할 수 있도록 차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김장훈이나 싸이나 갈길이 바쁜 사람들이다. 할 일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기사의 홍수속에서 문제의 해결은 멀어지고 발목만 잡히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기만 하다. 그들을 자꾸 쑤셔댈 것 만이 아니라 조용히 시간을 주자! 갈등설이 있다는 정도로 보도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이후는 당사자들이 조용히 문제를 풀어갈 것이다. 그들의 관계를 자꾸 파헤쳐서 국민의 신뢰를 자꾸 잃게 하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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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머물러 있는 시간인 줄 알았는데' 시간은 어느새 흘러가 버린다. 이런 흐름을 실감나는 하는 것들이 우리의 도처에 늘려있고 그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변화한 모습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순응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아무리 발버둥쳐 받자 소용이 없는 일이다. 주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지나간 사진속 모습들이나 추억속의 기억들을 떠올릴 때면 변화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고왔던 부모님들의 늙어버린 모습에서, 친구의 모습에서 정작 자신의 모습을 보게도 된다.



대중의 인기를 얻었던 연예인들도 그런 존재들 중에 하나이다. 특히 영화나 TV에서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왔던 연예인들이라면 더욱 그러하지 싶다. 그들의 모습을 영상 속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우 이대근을 기억하실 것이다. 한 공중파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담백하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가 31년 동안이나 기러기아빠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말 궁금증을 자아내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쩌랴 개인사이고 개인의 속사정을 시시콜콜 캐묻는다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니 말이다. 31년이란 세월은 강산이 3번이나 변하는 시간이다. 그 기간을 가족과 떨어져 생활해 왔다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물론 비록 떨어져 있지만 자주 만나기도 할 것이고 인터넷의 발달로 자주 연락을 할 것이다. 300회나 워싱턴을 오갔다고 한다. 하지만 함께 생활하는 것만큼이야 할까?



이대근의 이런 속사정을 접하니 외롭게 죽어간 김희라나  얼마 전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김추련이 떠오른다. 정말 세월이 덧없다는 사실을 실감케 하는 사건들이었다. 대중의 인기를 누리며 생활하던 한 연예인의 쓸쓸한 죽음과 자살 소식은 개인의 사생활로 돌리기에는 무언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는 없다. 죽은 김희라나 김추련만이 알 것이다. 대중의 인기를 받으며 화려한 삶을 살았던 시간과는 달리 쓸쓸하게 외롭게 살다 죽음에 직면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변해 간다는 것은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다. 점점 변해서 늙고 늙어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물의 흐름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연스러운 변화와는 달리 '쓸쓸한 몰락' 은 자연스럽지가 못해 보인다. 자연스러운 삶에 이물질이 끼어있는 느낌이다. 왜 삶이 그렇게 되어버렸는가는 개인사이지만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대근이 기러기 아빠로 31년간 홀로 살아왔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쓸쓸한 몰락은 아니지만 31년 동안 기러기 아빠로 살아온 것은 자연스럽지가 않아 보인다.  대중의 인기를 누리면서 살아왔듯이 연기자의 명예를 간직하면서 노년을 보내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말이다. 모든 연예인들이 행복하면 좋겠다. 인기를 누렸던 만큼 행복해 지면 좋겠다. 그게 아니더라도 평범함 속에서도 평온하고 품위있게 살아가면 좋겠다. 함께 울고 웃었던 연예인들이 행복한 모습을 보면 좋겠다.



이와는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자연에 순응'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떠오른 이미지는 연예인들의 지나친 성형이다. 성형은 자연을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부자연스러운 발버둥 같은 제스처들을 도처에서 목격하게 되면 참 짠하게 된다. 흐르는 시간에 그렇게 악착같이 저항하기 보다는 좀 더 자연스럽게 자신을 풀어 놓으면 좋겠다. 그래서 선배 연예인들의 '쓸쓸한 퇴장'(?) 을 보면서 자신의 '늙음' 에 대해서도 한 번쯤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인기라는 것도 덧없지 않는가? 혹 노년에 성형 후유증이라도 생긴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기까지 할까. 인기는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보여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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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출처: http://www.reviewstar.net/news/articleView.html?idxno=266533

윤희에 대한 우진의 사랑(또한 그 역으로도)을 보고 있노라면 사랑이 참 제어하기 힘든 감정적인 현상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맹목성은 사랑에 앞뒤를 재지않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정말 너무나도 격렬하고 열정적이라 주위의 조건들을 돌아보지 않는 맹목성을 갖기 쉽습니다. 우진이 윤희와의 사촌지간(비록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관계임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열정과 격렬함으로 인한 맹목성 때문일 것입니다. 주위의 시선이나 관습 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우진의 사랑이 격렬하고 열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이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까요? 우진이 윤희와 결혼을 하면 날마다 윤희에게 포로포즈를 하는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한다지만 과연 우진이 윤희를 그토록 사랑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인간의 감정을 마모시키고 격렬하고 열정적인 감정을 무디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무뎌진 사랑의 모습, 변화한 사랑의 모습이 김동훈과 서혜진, 권기창과 김영희 부부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도대체 젊은 날의 그들의 격렬했을, 열정적이었을 사랑은 어디로 가고 말았을까요? 이제는 다른 남자에서 눈웃음을 치고 불륜을 의심하며(김동훈 서혜진 부부는 이해 화해를 했지만),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으려는 막가는 부부가 되어버렸으니 말입니다. 무엇이 그들 사랑의 모습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까요. 사랑이 변한 것일까요, 그들이 변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 둘다 일까요? 만약 우진과 윤희가 결혼한다면 바로 이 권기창과 김영희 부부의 모습에서  우진과 윤희의 미래의 부부 초상을 추측할 수 있지는 않을까요? 권기창과 김영희를 희화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이 이렇게 변화한 모습은 비극이라기 보다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기 때문일까요. 결국 부부간의 사랑이란 격렬하고 열정적인 남녀간의 사랑에서 삶에 찌들리는 부부의 관계로 변화하는 것이니까요. 이러한 변화한 사랑의 모습은 희화화 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미지출처: http://www.drama/believelove/report/photo/index.html


그러다 시간이 흐르게 되고 또 변화를 겪게 됩니다. 사랑의 변화 곡선은 참 기가 막힙니다. 우진의 입에서 그토록 변화지 않으리라는 단호했던 사랑의 말은 권기창의 입에서는 고등어 타령과 교양 타령으로 롤러코스터처럼 미끄러지다 이제는 김영호(송재호 분)와 이미경(선우용녀 분)의 달관과 관조의 부부관계로 안정적이되는 변화하는 곡선의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작은 파동을 그리는 곡선이 됩니다.  


또 그러다 한평생 부부로 살다 한쪽이 먼저 세상을 떠나가고 나면 그 심정은 어떠할까요? 홀로된 차귀남 할머니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은 다시 과거로 과거로 달려가겠지요. 그러나 우진과 윤희의 격렬하고 열정적인 사랑과는 달리 조용한 가슴으로 되새김질 되는 그런 사랑의 기억들이겠지요. 차귀남 할머니(나문희 분)로부터 표면적으로 그런 모습을 접한 적은 없지만 분명 그러할 것입니다. 지난날을 반추하면서 사랑의 이런저런 모습들을 그릴 것입니다.


사랑을 남녀 이성간의 사랑에 국한하면서 그 변화의 모습들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사랑이란 그 세대별로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간의 생각이 충돌하기도 하지만 사랑의 본질은 아름다움입니다. 윤화영이 우진의 사랑을 극구 반대하고 있는 것도 우진에 대한 그녀의 과거의 회한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의 순수함을 의심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이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을 둘러싼 갈등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의 차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모습들은 시간과 함께 변화하지만 사랑은 인간이 의지하고 믿을 만한 것이 아닐까요? 사랑은 이렇게 인간의 삶 속에 스며드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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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로컬과 글로벌 사이에 끼인 시청자들?

뜬금없는 생각이지만 <도망자>는 왜 글로벌해야만 할까? 왜 일본과 중국, 미국 대신에 강원도, 제주도, 서울, 부산을 배경으로 드라마를 전개할 수는 없었을까? 이런 생각은 글로벌하다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단순히 호기심이다. 다만 일본어와 중국어 영어 대사로 자막을 보아야한다는 불편함 때문이다. 헐리우드 영화의 경우 이렇게 다국어로 제작한 영화는 많다. 그러나 대부분 비중 없는 부분이나 엑스트라 부분의 대사를 번역처리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필자가 본 영화에만 국한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과 달리 <도망자>는 한국말이 주류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일본어와 중국어, 그리고 영어가 난무한다. 자막으로 번역된 대사를 보려니 번거롭고 어떤 경우에는 흐름이 끊어지기도 한다. 왜 이렇게 다양한 언어를 사용해서 시청하는 데 피로감을 느끼게 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런 자막의 문제는 사소하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세계를 누비며 비쥬얼한 이국적인 느낌을 제공하는 것을 그러한 단점을 커버하는 장점으로 여겼서일까.


아무튼 이렇다 보니 <도망자>는 시청자의 연령층을 참 협소하게 만든 것 같다. 이와 같은 생각은 필자의 이전 포스트(2010/10/07 - [드라마/도망자 Plan B] - 도망자 Plan B, 김탁구를 넘을 시청률 상승에 시동을 걸다?)에 달린 댓글을 읽고 느낀 점이다. 도망자는 애초에 시청자 연령층을 주로 20~40대로 타겟팅한 것 같으며 <제빵왕 김탁구>와 같은 다양한 연령층이 즐겨보는 국민드라마를 의도한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시청자 연령대를 협소하게 만들면서도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글로벌한 드라마로 만들었을까? 아마 여기에는 드라마 제작 이전에 치밀한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누가 적자보려고 드라마를 제작하려고 할 것인가? 필자의 추측으로 드라마 수출을 통한 수익과 드라마 외적인 로열티 수입을 의도하고 있지 않나 싶다. 또한 우리나라 내에서는 시청률을 한정시키고 있지만 ‘글로벌‘ 한 관점에서 보면 시청률은 더욱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글로벌 스타 비가 아시아의 20~30대의 연령층을 끌어들인다면 시청률은 엄청나지 않을까. 드라마 시장이 협소한 우리에게는 다소 위험스러운 도박이 아닌가도 싶지만 과감한 시도에는 박수를 보낸다. 아무튼 잘 되기 만을 바랄 뿐이다.



만약 이 <도망자>를 로컬하게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이 부분도 제작진은 분명 고려했을 것이다. 그런데 글로벌을 선택한 것은 단지 ‘글로벌’ 이 여러모로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로컬 드라마 <추노>의 제작진이 글로벌한 대형 드라마를 제작했다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아무튼 로컬과 글로벌한 배경은 그것들 자체로 의미가 있다. 로컬이 좋다, 글로벌이 좋다는 식의 선택의 대상도 아니다. 이미 글로벌이란 인식 자체가 로컬화 되고 있는 추세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어디 해외 여행이 평생 일대의 대사이인가. 그냥 제잡 드나들 듯이 나가는 것이 해외여행이지 말이다. 믈론 '제집 드나든다' 는 말은 보편적인 의미로 사용하기는 아직 이르긴 하지만 말이다. 로컬이나 글로벌은 단순히 호불호의 문제일 뿐이다. 제작진의 의도로 선택되고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다. 다만 너무 글로벌을 지향하다보니 여러 개의 언어가 난무하고 자막을 보며 내용을 따라가려니 흐름이 간혹 깨어지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되는 것이다.


사건을 해결해가는 두뇌를 사용해야 하는 탐정 이야기이다 보니 약간은 신경을 써야하는 데 설상가상 자막까지 읽어야 하니 피곤하다. 이 드라마를 보게 될 일본, 중국, 그리고 다른 아시아 사람들에게는 줄곧 이어지는 자막에 자주 끼어드는 그들의 언어에 편안함을 느끼겠지만, 우리말로 대사를 듣다가 자막을 보아야하는 한국 시청자들에게는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작진은 글로벌한 성공을 위해서 로컬한 불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무튼 이미 글로벌을 선택하고 스토리를 이어가고 있으니 그저 성공하기만 바랄뿐이다. 재미와 감동이 따라준다면야 자막 정도의 불편함 쯤이야 이해해 주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 KBS 드라마 포토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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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조금씩 등장인물의 모습들이 낯익어 진다. 지우도 나카무라황도 그 과장된 연기가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온다. 진이의 비밀스러움도 마찬가지이다. 첫인상은 그리 믿을 것이 못되나 보다. 도망자의 첫인상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이 비등했다. 필자 개인의 추측이지만 이제 <도망자>에 대한 첫인상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들은 조금 수그러들지 않을까 싶다. 아직 작품의 완성도 운운하기는 이르지만 작품의 완성도도 높아 보인다. 흥미와 즐거움이라는 관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드라마를 평가하는데 이 흥미나 즐거움의 요소가 양대산맥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흥미가 고조되고 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아직은 모를 일이지만, 여기에 감동까지 추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대부분의 드라마가 그렇듯이 1,2회를 보기가 참 힘들다. 인내심 없는 시청자를 솎아내려는 듯이 여겨지기도 한다. 사실 이런 경우에 직면하면 살짝 기분이 나쁘다. 이런 농담 같은 말을 소설에 대해서 어느 소설가가 한 듯도 한데 그 이름이 잘 기억나질 않는다. 필자가 생각건대 이건 고의적인 의도라기보다는 시작단계는 언제나 ‘일반적’ 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 아닌가 싶다. 특히 숨이 긴 장편이나 대하소설 같은 경우는 말이다. 그러다 페이지수가 몇 장 넘어가면서 주인공의 이름이 익숙해지고 배경이나 사건들이 ‘구체화’ 되면서 흥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도망자>는 3회에 이르러 일반적인 성격에서 구체적인 성격으로 넘어가기에 흥미가 더욱 고조되고 있다. 비의 연기도 어색하지 않고 좋다. 탐정이라는 캐릭터가 갖는 허허실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눈빛을 번득이며 진지함을 드러내는 모습이 실감 있다. 만화적인 상상력이 풍부한 분들에게는 더욱 그러할지 모르겠다. 지우(비 분)가 사건과 더욱 밀착되면서 그의 캐릭터도 좀 더 생동감을 얻고 있다. 1,2회에서 사건과 유리된 상태에서 비의 연기만으로는 다소 과장된 느낌이 들었지만 사건의 한 부분으로 그가 자리하면서 캐릭터가 개성을 발하고 있다. ‘일반적‘에서 ’구체적‘ 으로 진행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조금씩 몰랐던 부분들이 표면 위로 오르는 것이다.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하나씩 하나씩 단서들을 잡아가고 흥미가 고조되는 것이다. 이렇게 ’일반적’에서 ‘구체적’ 으로 나아가는 몇 몇 점들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1.등장인물

이미 언급했지만 지우는 일반적인 인물에서 구체적인 인물로 변하고 있다. 아니 가장 구체성을 띤 인물이었다. 1회는 거의 그의 소개로 할애가 되었으니 말이다. 과장된 표정이나 행동이 있긴 했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사건과 밀착되면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근데 돈과 여자에 너무 집착하는 모습은 좀 자제하면 좋지 않을까?


진이도 마찬가지이다. 그녀의 정체는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다. 그러나 지우와 함께 후쿠오카로 건너가면서 만나는 카이의 존재와 황미진와 히로끼의 관계, 더 나아가 이들과 멜기덱의 관계가 시청자들의 추측권 안으로 들어오면서 진이의 정체도 조금씩 베일을 벗고 있다. 또한 양두희의 출현도 진이를 둘러싸고 흥미를 자아내기 시작하고 있다.


2.사건

지우와 진이를 등장인물의 예로 들었지만,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베일에 가려있던 사건이 지우와 진이가 추적해가면서 윤곽을 잡아갈 것이다. 3회에서 이와 관련해서 황미진(윤손하 분), 히로끼(타케나카 나오토 분), 키에코(우에하라 타카코) 등이 등장하면서 궁극의 목표물인 ‘멜기덱’ 에게로 서서히 다가가고 있다. 이 지점에서 시청자들은 이들이 멜기덱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이렇게 사건도 멜기덱의 살인과 진이의 복수라는 ‘일반적‘ 인 성격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오고 있기에 흥미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3. 배경

배경도 마찬가지이다. 장소들도 좀 더 구체적인 공간으로 나타나고 있다. 호텔, 온천, 식당, 공연장, 옷가게 등으로 현실감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이러한 배경의 현실감도 일반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지우와 진이가 멜기덱을 추적하는 과정에 대한민국 경찰 도수가 지우의 친구였던 케빈의 죽음과 관련하여 그를 추격하는데, 경찰이 지우와 진이의 장애물이 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것도 스토리를 더욱 밀도있게 만들면서 시청자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제 3회가 지나면서 인내심의 시험도 잘 치루었다. 이제는 좀 더 드라마에 몰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한가지 흠이라면 영어와 일본어, 그리고 우리말이 뒤섞이면서 흐름을 자꾸만 깬다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KBS 드라마 포토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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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스터 삼형제(찐빵, 빠삐용,에이스)가 함께 살던 때의 사진입니다. 지금보다 어린티가 납니다. 삼형제 녀석들이 참 사이가 좋았는데 말입니다. 이제는 에이스는 혼자 떨어져 살고 있답니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모든 생명들이 겪어야하는 운명이겠죠. 지난 사진들을 다시 한 번 둘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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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성공과 여행의 상관관계

연애는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이다. 현실은 저만치 멀어지고 둘 만의 새롭고 신비한 세상이 펼쳐진다. 세상은 자신들만의 무대가 되며 세상 사람들은 엑스트라가 된다. 이런 연애감정은 모든 연인들의 공통된 감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인들만의 세상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고 도 모두가 엑스트라인 이상한 세상이 된다. 그게 꼴블견이었을까? 이걸 화들짝하고 깬 영화가 그 이름도 유명한 <슈렉>이다. 마치 엑스트라가 주인공인 듯하고, 그 유명한 만화의 주인공들이 엑스트라가 되었으니 말이다. <슈렉>은 연인들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외친다. 그런 현실이 더 사랑스럽다고 외친다. 인간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외모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라고 주장한다. 그 주장은 제법 설득력이 있어서, 슈렉이 멋져 보이고 피오나가 아름다워 보인다.


교훈적인 슈렉. 그러나 현실은?


영화란 그런 거다. 은근히 교훈적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정작 연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교훈이 잘 먹혀들지 않는다. 이재(利財)에 밝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연인들이 연애라는 황홀한 세상에서 그들만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 그것은 지극한 감정의 세계라 이성이 끼어들기가 참 벅차다. 맹목적이다. 세상의 반이 남자요, 여자인데 오로지 한 여자, 한 남자만이 전부가 된다. 노래의 가사나 연애소설의 한 구절만 슬쩍 훑어보아도 연애의 맹목성을 발견하게 된다. 당신은 나의 운명이라느니, 모든 것이라느니, 심지어 이 보다 더 속이 울렁거리고 니글거리는 표현들이 부지기수다.


그러나 연애라는 새롭고 신비한 세상이 파열을 일으킬 때가 있다. 운명이었던 존재가 순식간에 더 이상 아무 상관이 없는 불필요한 존재가 된다. 이 세상 하나 밖에 없는 주인공에서 엑스트라가 되는 비참함. 그야말로 불시착이다. 아니 추락이다. 운명적인 존재에서 불필요한 존재로 추락하는 그 충격을 원자폭탄 이상의 위력을 가질 것이다. 이런 충격이 어디 있을까? 꿈속에서 날아다니던 세상은 온데간데없고 소수병이 나뒹구는 어둑한 방구석이다. 이렇게 동화의 세계와 현실을 드나들면서 인간은 성숙해간다. 연애는 아름답다는니...... 하다가, 눈물이라느니...... 하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까지 택한다. 이런 선택은 제발 하지 말어야 한다. 약이 있는데 말이다. 독한 약은 빨리 고칠 수 있지만 몸에는 좋지 않다. 순한 약, 느리게, 느리게 약효를 발휘하는 약이 있다. 그게 바로 시간이다. 시간은 참 좋은 약이다. 느리게 효력을 발휘하지만 전방위적인 약효를 발휘한다. 약발의 범위가 아주 넓고 깊다.

시간이 약이다


하지만 가능하면 연애는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지속되고 부드럽게 현실이라는 활주로로 착륙하는 것이 좋다. 부드러운 착륙이란 연애의 무덤이라는 결혼이다. 결혼은 동화의 세계가 현실로 이동하는 입구가 된다. 같은 방에서 비슷한 잠옷을 입고 자고, 방구를 뀌고, 화장기 없는 얼굴을 쳐다보고, 튀어나온 똥배를 보면서 동화의 세계는 서서히 현실이 된다. 결정적인 한방은 아기다. 아기 울음소리에 분유와 귀저기 값 걱정을 하게 되고, 아기 울음에 달콤한 단꿈을 깨어야 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제 현실은 그냥 현실이 아니라 고해의 바다가 된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해의 바다. 동화의 세계는 이렇게 서서히 부드럽게 현실로 착륙하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이다.


서두가 너무 길었다. 그렇다면 연애와 여행의 상관관계는 어느 정도일까? 상, 중, 하의 정도로 말하자면 상이다. 파이도표로 말하자면 거의 80% 이상이다. 과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그렇게 주장하고 싶다. 결혼전 연애의 시기이던, 결혼 후 연애이던 연애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수단으로서 여행은 절대적이다.



연애의 성공과 시간의 상관관계는?


그렇다면 연애와 여행의 상관관계가 그토록 클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한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 토록 가슴 뭉클한 연애 감정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여행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열지 않는 연인들의 마음이 여행에서 스르르 열린다. 바로 여행지가 동화적인 세계의 배경으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연극 무대에서 무대 배경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면 된다. 무대 배경이 없는 연극은 여행 없는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좀 억지스럽고 과장되게 여겨지지만, 그만큼 여행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혼전이라면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주장은 아주 설득력이 있다. 신혼여행 없는 결혼을 생각해 보면 상상이 갈 것이다. 또한 우리가 흔히 속된말로 (결혼을 전제로 한다면) 일단 사고를 쳐라는 말은 여행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론 여행이 아니라도 역사적인(?) 사고는 흔히 일어나지만 이국적인 여행의 공간이 사고를 칠 수 있는 더욱 로맨틱한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깊은 사랑을 위해서도, 진실된 화해를 위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여행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동화의 세계를 위한 배경이 필요하듯이 말이다. 이렇듯 연애와 여행의 상관관계는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연애와 여행의 상관관계라는 표현은 너무 막연한 느낌이 있다. 여기에서는 연애의 성공과 여행의 상관관계라고 생각하시기 바란다.

Posted by 걸어서 하늘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