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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사랑을 믿어요

사랑을 믿어요, 여동생도 모르는 김철수의 정체?


 사랑을 믿어요, 김철수는 왜 동생을 속이고 있을까?


아주 평범하고 성실하며 순박한 청년인 김철수는 가끔 톡톡 쏘기는 하지만 역시 근본 심정은 착한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오빠에 대해서 동생은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실제적인 삶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꾸민 연극이라면 이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꾸민 듯한 연극이 아니라 실제 범상치 않은 존재로 보이기에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러한 모습이 현실이라면 왜 동생에게는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있었다거나 경제적으로 대박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어떻게 오픈카를 타고 다니고 어떤 큰 계약의 당사자로 등장할 수 있을까?


이미 언급했지만 그 비밀은 느닷없는 것이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틀림없다. 심지어 여동생까지 속이고 있는 형국이라면 더욱 그렇다. 여동생과 함께 작은 국밥집을 운영하고 있는 한 청년이 갑작스럽게 달라진 모습은 그 이면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 말이다. 시청자가 이럴진데 여동생 김철숙은 얼마나 놀라울까? 아니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오빠가 자신이 알고있는 오빠가 아니라면 이런 배신감도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 기가 막힐 정도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reviewstar.net/news/articleView.html?idxno=261381




이런 호기심은 그 강도에 비례해서 설득력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 알려져 있지 않은 과거사를 드러내는 형식이 될 것인데 현실적인 삶과 너무 동떨어진 내용이라면 설득력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예를 들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부모가 느닷없이 나타난다거나, 여동생 몰래 투자한 돈이 엄청나게 불었다거나, 갑부인 친구와의 동업으로 떼돈을 벌었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들은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과는 동떨어진 개연성을 상실한 것이다. 기존의 스토리 프레임에 이런 사건이 갑작스럽게 등장하게 되면 감정적인 통쾌함을 느낄 수는 있지만 이야기를 망치게 되기 쉽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이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오히려 이런 부분들이 호기심을 자아내면서 시청률까지 높인다.


사실 드라마와 문학성은 점점 멀어져만 가는 추세인데 현실에 찌든 대중에게 어쩌면 문학성이란 것이 사치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필자 또한 대중의 한 사람으로 마찬가지이다. 개연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감정적인 통쾌함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가 일상과 관련해서 더욱 더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다. 아니 현실을 잊게 하는 수단이다.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이야기가 더욱 피부에 와 닿는다. 그만큼 하루하루 현실에 얽매여 살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건 현실의 외피가 문학적인 감수성을 막고 있는 탓일 것이다. 예를 들면 시장의 좌판 상인들은 드라마가 곧 현실이다. 문학성을 따질 그런 시간적인, 존재론적인 이유를 쉽게 발견하기가 어렵다. 


문학성은 여유와 사색에서 나온다. 삶과 인간에 대해 ‘어떻게’ 보다는 ‘왜’ 라는 본질적인 물음을 묻기 때문이다. ‘어떻게’ 는 ‘왜’ 의 부차적인 질문이다. 그것은 ‘왜’ 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떻게’ 와 ‘왜’ 는 큰 부분이 교집합으로 존재한다. 왜라는 사유의 물음에 어떻게가 결과적으로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어떻게는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삶을 살아가는데 현실적인 수단들이다.



인간의 본질을 탐색한다거나 삶의 깊은 의미를 드러낸다거나 하는 문학성과는 살고 있는 현실이 너무 팍팍하긴 하다. 작가나 시인이 아니더라도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고 사색하는 여유를 의식적으로 만들어 낼 필요는 있어 보인다.


이렇듯 오늘날의 드라마는 개연성의 문제나 삶의 본질과 같은 문학적인 깊이는 그리 생각할 바가 아닌 듯 하다. 여동생이 오빠에 대해서 모른다는 사실이나 오빠가 여동생에게 삶의 큰 부분을 숨기는 것은 이제 그리 놀랍지도 않다. 이런 정도는 약과에 불과하다. 아무튼 김철수의 정체가 참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