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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시크릿가든, 한 편의 성인 동화와 영혼 체인지



<시크릿가든> 본방을 사수하지 못하고 이제야 재방으로 보고 있다. <시가> 폐인님들에게는 한참이나 뒤떨어졌다는 소리를 듣기에 충분한 것 같다. 재방으로 보니 그 신선함이 다소 떨어져 김빠진 맥주를 마시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디테일한 부분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긴 하다. 톡톡 튀는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김빠진 맥주를 채워주고 있다고나 할까?


재방으로 보고 있는 주제에 뒤늦게 새롭지도 않은 감평이라는 걸 쓰기는 민망하고, 단지 김주원과 길라임의 영혼 체인지가 갖는 의미를 나름대로 뒤늦게나마 되새겨 보고 싶다. 이건 현실적으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스토리상에서 '영혼 체인지' 가 갖는 겹겹의 의미들을 알지 못하는 필자이고 보니 단지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생각이 나열될지도 모르겠고, 다소 드라마의 내용상 그 본질적인 의미와 유리 된 글이 되지 않을까도 싶다.


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4&c1=04&c2=04&c3=00&nkey=201101192338013&mode=sub_view


대개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문학작품에서 영혼은 원혼인 경우가 많다. 비록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육체를 잃은(육체가 죽은)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필자는 유령, 귀신, 성령 같은 단어들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구별하지 못한다. 다만 피상적인 생각이지만, 유령, 귀신, 성령 등은 비록 가시적인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불가시적이며 비현실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육체를 상실한(비록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죽은) 억울하게 죽거나 원한 맺힌 영혼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영혼이 햄릿의 아버지의 영혼이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샤머니즘에서 혼을 불러내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원혼인 경우가 많다. 초혼제를 하고, 49제를 하며, 제사를 지내고 조상에게 기도를 한다.


이와는 다소 다른 것이 서구 기독교의 성령(The Spirit)이라는 것이다. 이것도 달리 말하면 신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세속에 속한 것들을 끊임없이 죽어야 한다. 육신도 그 하나이다. 그럴 때 신자들의 마음에 신의 영혼(성령)이 들어와 완전히 새로운 신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원혼이라기보다는 구원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지만, 따지고 보면 사탄에 대한 응징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니 상대가 있는 것이다. 성령이 사탄을 거듭나게 하지는 못하는 것이고 보면 이 사탄은 영원히 인간을 유혹하고 구렁으로 빠트리는 존재이다. 만약 한 인간의 내면을 사탄(악한 영혼)이 지배한다면 인간은 신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성령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탄을 물리치는 존재로 말이다.  


이러한 영혼의 존재를 믿는 것은 죽음으로 단절 될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영속성을 제공한다. 기독교에서의 성령 받음은 영생을 보장받는 것이며, 불교에서의 윤회는 영속적인 생의 다양한 변주를 의미한다. 유교도 마찬가지이다. 조상을 모시는 제사 행위는 곧 죽은 뒤에 찾아 올 수 있는 현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http://isplus.joinsmsn.com/article/790/4947790.html?cloc=



영혼은 육신을 빠져나가야지(육체가 죽어야지) 만이 그 독자적인 활동이 가능하다. 산자에게서 영혼이 빠져나가면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햄릿의 아버지나 처녀귀신처럼 사후에 원혼이 되어 나타나거나 불교에서처럼 사후 영혼이 윤회를 거듭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렇게 육신이 죽어야지 많이 영혼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밀알이 썩어 새싹을 틔우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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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리가든>에서는 주원과 라임의 영혼들이 서로의 육체를 바꾸어 들어간다. 이런 경우는 참 독특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서로의 영혼이 다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원은 라임으로 라임은 주원으로 새롭게 거듭난 것이다. 불교적의 윤회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지만 죽음이 없이 영혼이 교체된다는 것은 재미있는 발상이다.


이렇게 육체가 죽지 않고 영혼이 바꾸는 것은 무엇을 의도하기 위해서 일까? 타자 속에 자아의 영혼이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타자가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타자의 육체를 빌어 세계를 지각하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세계가 사라지듯이 타자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세계는 다를 것이다. 코도, 귀도, 피부도......모든 감각들이 다 다를 것이다. 자아의 영혼으로 타자의 육체를 통해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이해와 소통의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 이외에 또 어떤 방법이 있을까? 불가능한 상상이지만 인간이 부단하게 해야할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사라지는 지점이며 완전한 이해와 소통인 까닭이다. 


따라서 주원과 라임의 영혼 체인지는 좀 더 확대하면 타자를 향한 이해와 소통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만드는 모든 종류의 갈등은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소멸할 때만 사라질 수 있다. 자아와 타자가 충돌하는 이 경계에 꽃을 피우고자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슬픈 운명일 것이다. 주원과 라임의 영혼 체인지는 소멸시킬 수 없는 자아와 타자의 경계에 대한 안타까움의 발로이다. 세상의 소란에 대한 작은 평화의 소망이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너무나도 애틋한 것이 아닐까! 이제 우리가 주원과 라임이 되어보는 것은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