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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수상한 삼형제

수상한 삼형제, 태연희의 변신은 유죄?



수상한 삼형제, 태연희의 피상적인 변신은 유죄?




<수상한 삼형제> 64회에서 몰락한 태연희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태연희의 변화한 모습은 이전의 태연희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이전의 자신만만하고 당찬 모습은 어디가고 궁색하고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었다. 우미를 그렇게도 실망시키고 가슴 아프게 했으면서도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오리발을 내밀면서 우미를 더욱 처참하게 만들던 태연희가 아니었던가? 한 때는 박사기를 호령하는 위치에 있는 듯도 했는데 이제는 자신의 증언 번복으로 인해 교도소 신세를 지고 있는 박사기의 부하들에 의해 쫒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인간의 변화라는 것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너무 심하다면 그 변화의 진실성을 의심받기가 쉬워진다. 조폭 두목이 목사가 된다든지, 살인자가 자선사업가가 된다든지, 범죄자가 정치인이 된다든지, 불륜을 저지런 여자가 수녀가 되는 급격한 변화는 어딘지 그 변화의 진실성을 믿기가 힘들어 진다. 그래서 사실 이러한 극단적인 변화가 현실에서 잘 일어나지도 않는다.  아니 일어나지만 지극히 제한되어 일어난다. 종교적인 영역에서의 각성 같은 것 말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세속에서 그러한 변화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현실적인 변화라는 것은 같은 종류의 감정이나 행동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그리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그런 변화들이 대부분이다. 예를들면, 어제 짜증낸 일을 오늘 후회하는 식이다. 오늘 과식한 것을 내일은 자제하는 등의 변화들이다. 내가 왜 그랬을까? 라는 자기 반성의 감정이나 행동도 동반된다.


우리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약간은 비현실적인 현실적인 소원인 급격한 변화를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로 많이 보아왔기에 그러한 변화를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수상한 삼형제>의 경우 하행선과 엄청난의 변화가 그런 경우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러한 급격한 변화를 목격하기란 힘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또한 반대급부를 노리는 위선적인 변화인 경우도 해당이 된다. 급격한 변화를 보인다는 것은 그 이면에 어떤 꿍꿍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한 면에서 태연희의 변화를 살펴 볼때 진실성을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수상한 삼형제> 제작진에게 부탁하건데 이제라도 태연희가 단순히 시청자들의 동정만을 받을 모습으로 피상적으로 변화시키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만약 태연희를 다시 동정의 대상이나 심지어 불쌍한 천사로 만든다면 태연희의 리얼리티는 너무나 떨어지고 만다. 왜냐하면 태연희의 변화가 지옥에서 천상으로이거나, 악에서 선으로 줄타기를 하는 너무 극단적인 변화를 겪을 징후가 보이기 때문이다. 64회에서 그런 징후가 조금 드러난 듯 하다. 이렇게 되면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사실 <수상한 삼형제>에서 태연희만 그런 것은 아니다. 현찰과 우미의 위장이혼 복수극이나 주범인과 계솔이의 로맨스도 그렇긴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리얼리티는 가지고 있다. 만약 태연희가 오르락 내리락 극단적인 변화를  겪는 다면 태연희야 말로 리얼리티가 떨어지고 말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미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태연희는 뻔뻔스러운 태연희-->조폭과 어울리는 악녀--->박사기 뺨치는 조폭녀 같은 여자--->거짓말 증언을 하는 음모가--->현찰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협박자의 이미지를 차례로 보여주었다. 연희가 악녀라 불릴만 하다. 그런데 64회에서 박사기 일당에게 쫒기는 태연희의 궁색한 모습, 통장의 잔고를  보여주면서 동정을 유도한다면 이 변화는 너무 설득력도 없고 급격한 것이다. 태연희는 아직 도우미나 현찰에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거나 용서를 구한 적이 없다. 여전히 악녀인 것이다. 연희에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또한 박사기 일당을 경찰에 신고만 하면 경찰의 보호를 받을 수도 있다. 


아무리 인간이 개과천선하고 심성이나 행동의 근본적인 변화가 급격하게 올 수도 있지만  그것은 대체로 종교적인 각성이거나 영적인 경우가 많다. 연희를 변화시키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만약 연희를 변화 시키려면 아주 처참한 상황으로 몰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떠오르게 말이다. <신언니>의 송강숙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처참한 자신의 처지를 통해 자신의 삶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각성시켜야 하는 것이다.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급격한 변화가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저 어설프게 동정심을 유발하는 화면 몇 커트로 연희를  불쌍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면 그 진실성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 차라리 연희를 하행선처럼 조용히 사라지게 하는 편이 더 현명한 것이다. 또 드라마 답기도 하고 말이다.  


64회에서 보여 주었던 그런 피상적인 장면을 통해 연희에 대한 동정을 일게 하거나 불쌍한 감정을 일어나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혹 64회의 이러한 장면들이 연희가 겪게되는 처참한 장면들의 시작에 불과하다면 필자가 너무 오해를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연희를 어설프게 다루지 말기를 바란다. 아무리 해피 엔딩을 만들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연희 마저 훌쩍 천사로 만들어 그 해피 엔딩에 동참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