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와 함께 빵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진 것 같은데요, 김탁구란 이름의 빵이나 봉빵이니 하는 빵도 목격하게 됩니다. 워낙 시청률이 높았던 드라마이다 보니 그 유명세를 타려고 하나 봅니다. 아무튼 이미 끝난 <제빵왕 김탁구>를 생각하면서 빵의 역사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요? 드라마가 하는 동안 올리지 못하고 이제야 올리게 되네요.


빵하면 우리에게는 그다지 절실한 것으로 와 닿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빵을 현대적인 상징물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의 주식이 쌀이며 밀은 서구에서 수입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우리에게는 멀리만 느껴지는 빵이지만 빵의 역사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오래되었습니다. 기원전 3천년 초기쯤 이집트의 무덤에서 많은 음식들과 함께 '밀로 만든 빵' 이 담긴 그릇들이 들어 있었는데, 고인이 저승에 도달하기까지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준비된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치즈도 발견된 것으로 보아 발효에 대한 지식이 상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오늘날 우리의 베이커리집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을의 거리에 있는 빵가게에서 다양한 빵을 팔았습니다. 40종류나 되는 '빵과 과자' 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으로 판매된 것은 발효된 빵(부풀린 빵)이 아닌 타(ta) 라는 납작한 빵이었습니다. 이것은 잔존하는 이집트인들의 두개골에서 치아가 닮아버린 것으로 보아 이집트인들은 아주 딱딱한 납작한 빵을 일반적으로 먹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발효 빵을 만드는 최초의 기술이 이집트에서 발전되었다는 증거와 연대는 매우 불확실하지만, 밀 생산이 거의 없었던 메소포타미아에 비해 초기 역사시대에 이집트의 자연환경조건이 밀 생산에 적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밀은 발효된 빵의 기본적인 곡물이었으며 보리와 수수는 그 화학적 구성 성분으로 인해 발효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는 왕조시대 초기에 왕겨가 쉽게 분리되는 밀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열처리 없이도 타작이 가능했다고 추측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밀은 오랫동안 귀족층을 위한 빵을 공급하기 위해 아주 제한적으로 재배되었고, 대부분의 밭에서는 재래식 밀을 재배하여 납작한 빵(ta)을 만든 것으로 추측됩니다.


밀이 발효에 적합한 이유는 배아에 글루텐을 형성하는 단백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트는 적당한 조건에서 이산화탄소를 생성하는 데 이 이산화탄소와 글루텐이 결합하면 반죽 내에서 작은 기포들로 이루어진 스펀지같은 덩어리가 만들어집니다. 여기에 열을 가하면 단백질이 단단해지면서 빵의 형태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의 인간이 먹었던 대부분의 곡식들은 탈곡을 잘 하기 위해서 미리 예비적인 열처리를 했기 때문에 부풀린 빵을 개발하기는 불가능했습니다. 즉, 열처리 없이도 타작이 가능한 곡물이 재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집트에서 이러한 열처리 없이 타작이 가능한 밀이 재배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이유입니다.
 

로마시대에 이르면 빵이 더욱 더 일반화됩니다. 로마의 역사가 유베날리우스는 로마인들이 빵과 서커스에 몰두해 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 빵의 일반화는 안노나(annona)라는 빈곤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정부에서 실시한 무상배급제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시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밀의 양이 엄청나게 요구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이 필요양의 1/3을 이집트에서 들여왔으며, 그 나머지 대부분은 북아프리카로부터 수입해 왔습니다. 기원전 2세기경 로마가 카르타고를 정복했을 때 밀밭을 파괴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서 로마시대에는 밀을 정제하는 제분업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밀을 가루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기원전 2세기경에는 제분업자들이 제빵업자도 겸하게 됩니다. 일종의 시너지 효과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로마의 제분, 제빵업자는 식품산업 분야에서 최초의 대량생산업자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시대에는 빵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긍정적이고 명확했습니다. 디필로스는 우수한 빵을 언급하면서 '완전히 정제된 밀가루로 만든 빵' 이라고 할 정도로 밀가루로 만든 빵을 영양 많고 소화에 탁월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갈레노스는 밀을 이용한 빵의 요리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큰 오븐에서 구워낸 빵은 모든 면에서 품질이 우수하다. 풍미가 좋고 소화하기도 쉬우며 잘 흡수 된다" 아테나이오스는 고대와 현대(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 그리고 본국와 외국의 빵에 대해서 논하면서 현대적인 의미의 빵에 해당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빵들을 언급하고 있어 놀랍습니다.
 

5세기쯤 이민족들이 유럽을 침략했을 때,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세계의 장례식'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음식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로마의 영향이 강했던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은 로마의 요리법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무역이 활기를 잃어가면서 리쿠아멘, 아위 등의 양념이 부족해지면서 어려움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북쪽의 나라들은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중세 국가들은 그 국가들마다 개별적인 요리법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례식이라기 보나는 발전했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는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문화와 문화가 섞이면 새로운 것이 많이 만들어지니까 말입니다.
 



중세에 북유럽에서 재배된 밀은 빵으로 만들어지기 보다는 프루멘티(frumenty, 우유가 든 젤리 형태의 음식으로 껍질을 벗긴 밀을 뜨거운 물에 담가 24기간 불렸다가 만듬)용으로 더 많이 이용된 듯합니다. 호밀은 원래 밀밭의 잡초였으나 중세에는 유럽 대륙에서 주요작물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호밀가루에 완두콩 가루와 약간의 보리를 섞어 평범한 갈색빵을 만들었습니다. 다수의 농부들은 밀을 재배하였으나, 다소 한랭한 지역에서 거둬들인 작물은 대체로 밀과 호밀이 섞여 있는 상태였다. 그것들로 만든 마즐린(maslin)이라는 가루로는 양질의 빵을 만들 수 있었고, 품위있는 집안에서는 페이스트리를 만들 때 사용했다. 북유럽의 가정주부가 순수한 밀로 빵을 만드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겠지만, 이따금은 밀과 호밀이 섞인 작물을 한아름쯤 거두어다가 프루멘티 요리용으로 쓰일 만큼의 충분한 밀을 가려냈을 것이다.


빵은 수도원이나 왕실에서 거두어 들이는 공물이나 현물세에 포함되기도 하는데요, 8세기경 한 영국의 마을은 웨섹스의 왕 인(Ine)이 정한 법률에 따라 왕실에서 소비할 물품을 공급해야 했는데, 거기에 둥근 빵 300덩어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9-10세기에는 북유럽과 서유럽의 주민들에게 여러 차례의 암흑기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자연재해였습니다. 857년에 라인강 유역에서 최초로 맥각 중독이 발생하여 수천명이 매일 먹는 빵에 중독되어 사망했다고 합니다. 호밀은 맥각 같은 유독한 균류에 감염되기 쉬웠으며 맥각균은 환각제 LSD를 포함해서 20종류의 독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심하게 감염된 호밀로 만든 빵을 먹으면 심한 복통, 정신착란, 괴저 및 피부에 급성 염증을 일으키고 사망에 이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매각 중독의 원인을 알지 못해 이 병을 성 안토니오 열(St. Antonio's Fire)' 이라고 믿었습니다.


*위의 글은 <음식의 역사>의 내용을 거의 전적으로 인용하였습니다.

음식의 역사 - 인류 음식문화의 서사시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레이 태너힐 / 손경희역
출판 : 우물이있는집 2006.04.17
상세보기


 

Posted by 걸어서 하늘까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Mikuru 2010.09.28 06: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군요...뭐 빵이라면 전 프랑스밖에... ㅋ;

  2. 티런 2010.09.28 06: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탁구땜에 더 흥미롭게 다가오는 빵의 역사군요~^^

  3. DDing 2010.09.28 07: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긴 시간동안 발효와 굽기에 관해 연구를 해 왔으니... ㅎㅎ
    빵이 사랑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네요. ^^

  4. 지후니74 2010.09.28 07: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주먹는 빵이지만 그 숨겨진 이야기에는 소홀했네요.
    좋은 정보 얻고 갑니다.~~

  5. 옥이(김진옥) 2010.09.28 08: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탁구가 대단한듯합니다..
    여기저기 제빵왕 김탁구입니다...
    빵의 역사도 흥미롭습니다..
    즐거운 화요일 보내세요~~

  6. Movey 2010.09.28 09: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빵의 역사 잘 보고 갑니다 ^^ 기숙사에 오니까 밥 못 먹고 빵만
    먹는다고 빵을 구박 (?)했는데 좀 이뻐해줘야겠어요~

  7. KEN☆ 2010.09.28 14: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빵왕 김탁구덕에 빵에 대한 관심도 다시 한번 일어났군요...
    제빵업계가 침체했었는데, 상당히 오래됐죠...
    부흥할 때가 온 것 같아요~~~

  8. 티비의 세상구경 2010.09.28 14: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탁구 덕분에 빵의 매력에 제대로 빠지신것 같은데요 ㅎㅎ
    이런 오랜기간의 노력이 있었기때문에 지금까지 사랑받는것 같아요 ^^;

  9. 원영.. 2010.09.29 15: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어디선가 비슷한 지식자료를 본 것 같네요..
    그때도 보면서 흥미롭게 봤지요.
    긴 명절 연휴 잘 보내셧나요..^^

  10. 십장생 2010.09.30 2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건강정㏓보㏅ <좋은 글 감사합니다.<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며 늘! 건강과 행복이 깃드시기를 기원드립니다<평생 건강지킴이>내 병은 내가 고친다

  11. 학생입니다 2010.10.01 0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빵의 역사와 관련된 과제를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됬습니다.
    좋은자료 감사드립니다. ^^

 

지붕킥, 세경의 짜장면이 해리의 갈비보다 맛있는 이유?


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0912280043


지금 선진국 문턱에 들어선 대한민국, 이 대한민국도 한 때 남의 지원을 받아야하던 찌들어지게 가난한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6.25 직후 전후 참상에서부터 60년대까지가 바로 가장 어려운 때가 아닌가 싶다. 역사상 수많은 전쟁을 경험했지만 6.25 만큼 잔인한 전쟁도 없었을 것이다. 몽고 식민지 100년이나, 임진왜란 7년이나, 일제 식민지 36년도 이 3년간의 6.25 전쟁만큼 비극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같은 동족 상잔의 비극이라는 점에서도 그 슬픔이 더하다.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미국의 잘잘못을 떠나, 만약 6.25 직후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비극은 더욱 참혹했을 것이다.


전후 미국의 대한 지원 중에 잉여 농산물 무상지원이 있었다. 미국은 당시 잉여 농산물이 너무 남아 처리가 곤란한 지경이었다. 밀의 가격이 하락하자 정부에서 적정가에 매입해 그 잉여 농산물을 태평양에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잉여 농산물 보관과 유지비 때문이었다. 참으로 한심한 짓이었다. 이렇게 바다에 버리던 잉여 농산물을 우리나라에 무상 원조라는 이름으로 지원해 준 것이다. 그게 미국에는 쓰레기에 불과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로서는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상 원조와 관련한 여러 말들을 모두 배제해 버리고 한마디 덧붙이자면, 잉여 농산물 무상제공은 가난과 기아로부터의 벗어남이 절체절명의 바램이었던 당시에 자존심을 돌아 볼 수없는 참으로 가슴 아픈 상황이었다.
 

이 잉여 농산물 중의 거의 대분분이 밀가루였다. 미국 남부의 밀밭과 옥수수 밭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넓다. 얼마나 넓었기에 흑인들을 수입해서 노예로 삼을 정도였을까? 노예의 노동력이 없었다면 밀밭 재배는 거의 불가능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인간의 식량이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여기에서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은 왜 인디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삼지는 않았을까다. 콜럼버스가 미대륙에 상륙할 당시 수많은(당시의 인디언 수는 들쑥날쑥 이다) 인디언이 있었지만 거의 전멸하다 시피했다. 유럽인이 옮긴 병원균에 감염되어 대다수가 죽었다고 하지만 확인하기도 어렵다. 인디언 대량학살의 죄를 줄이려는 눈가림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남미의 경우는 거의 백인들만이 살아남는 지경까지 가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남미의 원주민들은 병원균에 대한 면역력이 더 높았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 였을까? 물론 백인들의 희생도 있었다.



짜장면과 갈비찜


짜장면 출처:http://www.sportsseoul.com/news2/emotion/wine/2009/1109/20091109101150400000000_7623763283.html
갈비 출처:http://www.sbiznews.com/news/?action=view&menuid=75&no=19249&page=1&skey=&sword=


그러니 인디언들에게서 노동력을 충당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백인 그 자신들 마저도 그랬다. 이렇게 흑인 노예들의 노동력에 의해서 재배되던 밀이 기계화로 인해 잉여물이 남아돌아가 버리기까지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그 버려지던 밀을 우리가 원조를 받았다는 사실 또한 그렇다. 미국에서는 쓰레기에 불과한 밀이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생계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카오스이론의 나비효과가 이런 것이 아닐까? 흑인의 노동력이 대한민국에서 구원의 손길이 되었다는...... 심한 비약일까?


지붕킥의 세경과 신애 이야기를 하려다가 서두가 길어졌다. 화교들이 언제 짜장면을 만들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대중화되기 시작했는지 확실히 모르겠다(짜장면의 원조는 1905년 인천 차이나 타운이라고 한다). 6.25이후에 무상원조로 받은 밀가루와 짜장면이 어느 정도의 관계가 있는지도 궁금하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후의 포스트에서 다룰 수 있으면 좋겠다.
 

짜장면은 앞뒤 사정으로 보아 그렇게 흔한 음식이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에 바나나가 귀해서 아주 비쌌던 것으로 판단해 보면 갖은 야채에 돼지고기가 들어가는 짜장을 곁들인 짜장면이 값 싸지는 않았을 것이다. 1960~70년대에 짜장면은 아이들의 꿈이었다. 부모따라 어디 놀이동산이라도 가게 되면 심중팔구 중국 식당에서 짜장면을 먹는 것이 도식화 되어 있을 정도였다. 왜 이렇게 짜장면이 아이들의 로망이 되었는지도 무척 궁금하다.
 

식신신애(서신애)와 빵꾸똥꾸 해리(진지희)

http://sports.chosun.com/news/ntype2.htm?ut=1&name=/news/entertainment/201001/20100106/a1f77127.htm



그런 짜장면이었다.
 

<지붕킥>의 초반에 보듯이 세경과 신애가 깊은 산중에서 아빠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은 서울이라는 도시와의 공간적인 거리감이기도 하지만 2009년이라는 현재와의 시간적인 거리감이라고 할 수 있다. 세경과 신애는 1960년대, 70년대 초 아주 가난하던 시절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아가면서도 인간미 넘치던 그 시절의 서민들의 순수하고 순박한 모습을 세경과 신애는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짜장면이란 사실은 그 때 가난하던 그 시절의 추억들을 새록새록 떠오르게 하기에 충분하다. 여전히 짜장면의 위력은 대단하지만 도시의 아이들에게는 통닭과 피자와 햄버그가 더욱 친근하다. 이런 현실에서 세경과 신애가 짜장면을 그토록 좋아하는 모습은 가난했으나 인간미가 넘쳤던 1960년대, 70년대 초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줄리엔이 세경과 신애에게 짜장면을 사주는 것은 묘하게도 미국의 식량무상원조가 떠올랐다. 별스러운 생각인지 모르겠다. 줄리엔이 세경과 신애를 위해 자신의 방을 내어주는 것도 우리가 못살던 시절 미국의 원조를 받던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그렇다고 줄리엔이 미국이다라는 식으로 비약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세경과 신애의 모습에서 우리의 가난하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일 뿐이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세경과 신애는 순재네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게 된다. 다행스럽다. 세경과 신애가 살아갈 곳이 그래도 재미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불독같은 해리가 좀 껄끄럽긴 하지만 말이다. 세경과 신애와 이 가족들과의 의식적인 차이는 너무나도 클 수 밖에 없다. 세경과 신애는 수세식 화장기도 세탁기도 청소기도 믹서기도 모르고 사용하지 조차 모른다. 신애는 콜라, 아이스크림도 처음으로 먹어본다. 이런 아이들이다. 그러니 해리와의 의식적인 차이는 해리가 좋아하는 갈비와 짜장면의 차이만큼이나 클 수밖에 없다.
 

이런 장벽이 있긴 하지만 순재네 가족들은 참 인간적이고 재미있는 가족이다. 해서, 세경과 신애가 살아가기에는 참 다행스러운 공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바깥 세상은 세경과 신애에게는 살벌하기 그지 없는 곳이다. 화려한 칼라 사진 속에서 유독 세경과 신애만이 짜장면 색깔처럼 흑백으로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현실을 잘 적응해 가기를 기대한다.


Posted by 걸어서 하늘까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여행사진가 김기환 2010.01.12 07: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장면에 대한 냉철한 고찰이군요.
    덕분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 달콤시민 2010.01.12 09: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저도 자장면에 한표요! 하하하
    갈비찜에는 추억이나 의미가 크게 없지만 자장면에는 많은 추억과 이야기가 있어요.. ㅎㅎ
    졸업식에 항상 함께한 자장면들.. 어릴때 외식은 중국집 등등.. 아아~

  3. Phoebe Chung 2010.01.12 0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우 오늘 짜장면 먹고 싶어져서 큰일 낫네요.
    춘장 사려면 시내 한국 슈퍼 가야하는데....

  4. 보시니 2010.01.12 10: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붕뚫고 하이킥의 제작진은 코드에 관한 고찰 능력이 뛰어난 것 같아요.
    단순히 웃고 즐기기만 하는 시트콤이 아니라, 가족, 인간관계, 등에 대해
    세세히 생각하는 바를 제공하는 드라마인 것 같습니다.

  5. 쿠쿠양 2010.01.12 15: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걸보니 짜장면이 갑자기 땡기네요;;
    집에있는 짜장라면이라도;;

    글은 짜장면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인데 말이죠^^:

  6. 하록킴 2010.01.12 22: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햐! 이런 주제로 이런 흥미진진한 포스팅을 하시다니 ㅎㅎ 하늘까지님 최고+_+
    저는 요즘 자짱면보다 제육덮밥이 땡기더라고요 ㅎㅎ중국집 제육덮밥에 짬뽕국물 크악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