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제빵왕 김탁구>는 그 시대적인 배경이 60,70년대입니다. 2000년대와는 30여년의 시차를 두고 있습니다. 이 30년이란 시간 동안 수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발전을 통한 물질적인 풍요가 있었고 물질적인 풍요 한켠으로는 정신적인 삭막함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시대에 따라 인간의 행동과 사고에 대한 가치 판단도 변화해왔습니다. 특히 남성의 권위주의에 억압당해온 성, 여성, 아이, 교육 등이 시대의 변화와 함께 두드러지게 변화해왔습니다.


<제빵왕 김탁구>가 남성의 권위주의와 가부장제가 강력하던 60,70년대를 시대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지금 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이 6070 세대가 아니라면 드라마 내용상 현실과의 괴리와 모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10대의 고등학생이 이 드라마를 본다면 시대적인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물론 현재를 기준으로 하기에 60,70년대를 시대적인 배경으로 하는 <제빵왕 김탁구>의 내용을 이해하기는 커녕 오히려 엽기적이고 이상한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시대가 다르다는 상대적인 입장보다는 현재라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아주 열등하고 잘못된 문화로 치부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6070 세대라면 이 드라마의 내용이나 남자, 여자, 아이에 대한 생각을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이미 삶의 경험을 통해 이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드라마에 공감하고 추억을 반추할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너무나도 헐벗고, 굶주리면서 삶이 얼마나 피곤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을 그저 기차를 타고 가면서 스쳐지나가듯이 피상적으로 본다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빵왕 김탁구> 가 19세 이상 관람가능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10대, 20대, 심지어 30대까지는 그 시대적인 배경을 이해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사실 19세이상 등급 판정을 내렸지만 이 결정은 야하다거나 성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적인 이유가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시대적인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10대,20대들에게는 이 드라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19세 이상 관람가능하다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19세 미만인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좀 힘들 다는 배려에서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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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빵왕 김탁구>은 시대극으로 그 당시의 문화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물론 특수한 것을문화 상대주의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고 보편적인 것을 협소하게 이해하는 경우도 있을 지 모르겠다. 60,70년대의 시대 배경을 고려해 본다면 가부장적인 가족제도나 남아선호 등은 보편적인 그 시대의 문제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서인숙의 불륜과 구마준의 출생은 그 시대에도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아무리 상대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해도 ‘상대적인 이해‘ 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 바로 구마준의 출생이다. 너무 구마준, 김탁구라는 존재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구일중과 서인숙의 동시적인 불륜으로 가게 한 것은 참 엽기적이었다. 이것은 낯익고도 낯선 장면이라는 야누스적인 성격을 갖는다. 전통과 서구적인 것의 충동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본다면 <제빵왕 김탁구>는 시대를 반영하는 시대극이지만 동시에 시대를 초월하는 엽기 호러물(?)의 성격도 갖는다. 즉 구마준이 특수한 관계(서구적인)에서 나타난 존재라면, 탁구는 보편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가진자들에게는 흔하게 발생한 그런 관계(전통적인)의 상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김탁구, 구마준의 존재부터 시작해서 구일중 일가는 완전히 엽기적인 가족이다. 물론 구일중의 가족을 상징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족 내의 갈등을 사회나 좀 더 큰 집단에 대한 알레고리로 이용할 수도 있다. 즉, 구일중을 성공한 산업시대의 재벌로, 서인숙을 서구 사회의 개인주의적 존재로, 홍여사를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존재로, 그리고 김미순은 남존여비의 희생적인 존재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즉 산업화시대의 문제는 재벌과 서구문화와 전통이 뒤섞여 왜곡되게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구일중의 가족이 산업화시대의 문제라는 괴물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인공 김탁구의 삶은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일 테다.


아무튼 엽기적인 구일중의 가족이 상징하는 것이 사회라면 대단히 적절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구일중의 대저택은 언제나 불편하게만 느껴진다. 이 엽기적인 공간도 공간이려니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별 공통된 점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다. 특히 어른들의 존재는 참으로 엽기적이다. 구일중과 김미순이 정분을 나누는 것을 은근히 눈 감아 주던 홍여사의 태도, 불륜을 저지르는 서인숙과 한승재는 그 행동 자체도 엽기적이지만 가족내의 관계와 연관시켜 보면 더 엽기적인 인간들이다. 누구던 선악이라는 대체적인 판단을 하기 힘들 정도로 선악이 뒤섞여 있다. 단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구일중의 불륜이나 서인숙의 불륜이나 다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시대의 상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단지 서인숙이 더 부도덕하게 ‘여겨졌다’ 는 차이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비록 엽기적인 관계 속에서 출생한 탁구이지만 그렇다고 그 인간 됨됨이가 엽기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단지 엽기적으로 태어났다는 사실과 엽기적인 가족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참 맑고 순수하고 용맹한 탁구이다. 엽기적이고 혼란한 사회를 바로 잡아줄 존재이기를 바란다. 사회의 상징이 아니라 구일중의 가족이라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보았을 때 이 엽기적인 가족에서 탁구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면서 어떻게 삶을 헤쳐 갈지 참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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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빵왕 김탁구, 아직 막장이란 판단은 이르다!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1회에서 불륜의 장면들이 막장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은 그러한 비판이 이르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그러한 장면들이 출생의 비밀을 실감있게 그리고 있다는 면에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불륜만 나오면 무조건 막장이라는 비판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모든 불륜 장면이 막장이라면 이 세상에 막장아닌 드라마나 영화 소설이 없을 정도가 아니겠는가? <제빵왕 김탁구>에서 불륜은 구일중의 아내인 서인숙(전인화 분)의 주술적인 믿음과 남아선호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산물로서 이해할 수 있는 설득력있는 장면이며, 구일중과 미순의 불륜 또한 이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거성가의 간호사(보모)인 미순의 경우는 남성권위주의와 부에 희생당하는 여성성이라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이것을 단순히 불순한 남녀관계로만 폄훼하면서 막장이라고 한다면 드라마 전체보다는 부분에 집착하는 오류를 범하고 마는 것이다. 즉, 불륜 그 자체 만이 아니라 그것이 드라마 전체에 갖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등한시 하는 것이다. 드라마마나 영화의 경우에 남념의 애정씬이 내용상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영화 <하녀>에서 성적 노리개롤 농락당하거나 자발적으로 성을 수단화는 의식을 묘사하기 위해 성적인 표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그런 예이다. 영화 <동파리>에서 자식이 부모를 때리는 장면이나 <올드보이>에서 모르는 상황이지만 자신의 딸과 성관계를 갖는 것 등은 막장이라면 지독한 막장이다. 그러나 그것에 막장이라는 레벨을 달기보다는 필연적인 요소로 보는 것은 그 장면 자체가 아니라 큰 테두리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수상한 삼형제>에 대한 막장 논란도 마찬가지이다. 현찰과 연희의 불륜이나, 엄청난의 철없는 짓 등을 빗대어 막장이라고 비난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것은 가족드라마의 시간 편성상의 잘못일지 언정 막장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막장은 불륜이나 엽기적인 장면이 드라마나 영화의 내용에 시종일관하는 통일성에서 벗어나 맹목적이고 이유 없이 일어나는 경우로서 필연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1회에서 벌어진 불륜들은 단순히 막장이 아니라 스토리를 낳는 근원으로 파악되거나 원죄적인 운명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는 상징성과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 불륜은 어쩌면 성경에 있는 ‘태초의 말씀‘이거나 아라비안 나이트의 ’왕을 기쁘게 하는 이야기‘ 이나 철학의 ’합목적적 존재자‘ 의 위치를 차지하거나 비교될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제 2회에 접어들고 스토리의 전개가 점점 흥미가 있어지는 <제빵왕 김탁구>를 아직은 주지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섣불리 막장이라는 식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스스로의 안목을 너무 좁히는 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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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빵왕 김탁구, 영화 <하녀>의 이미지와 엇갈린 운명들


<신델렐라언니>가 막을 내리고 그 후속작으로 <제빵왕 김탁구>가 막이 올랐다. <신데렐라언니>의 세련된 대사와 영상미와는 달리 이 드라마는 투박하고 거친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드라마의 시대적인 배경이 되고 있는 70, 80년대의 촌스러운 모습이 한 몫을 한 듯하다. 이것은 70,80년대 일 것만 같았던<신데렐라언니>와는 묘한 대조를 이루는 것 같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는 독재의 서슬이 퍼랬고, 경제적으로는 재벌에 의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졸부들이 대량으로 생기면서 돈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흥청망청 돈을 뿌려대던 시기이기도 했다. 개발독재시대의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이었다.  


1회의 주된 공간이 되는 구일중(전광렬)의 저택은 70년대 서민의 상식으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대저택으로 졸부의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구일중의 선대에서 정직하게 노력해서 부를 축적했다고 해도 그런 느낌, 졸부의 이미지를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아마도 구일중의 차가운 이미지와  구일중의 아내 서인숙(전인화)의 서구적인 이미지가 맞물리고, 구일중의 모친인 홍여사(정혜선)의 전근대적인 사고가 합쳐지면서 이 가정이 무언가 비정상적이고 한바탕의 갈등을 몰고 올 것만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남아선호에 대한 집착이 일으키는 인간들의 엇갈린 운명이 시작된다. 갈등은 그렇게 시작된다.


아들을 통해 가업을 이으려는 구일중과 딸만 낳으며 홍여사에게 구박을 받고 실의에 빠지는 서인숙, 그리고 아들을 놓지 못하는 이유 외에도 어떤 이유에선지(딸만 낳아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판단) 서인숙을 싫어하는 홍여사는 오직 가업을 이을 수 있는 아들이라는 존재에 집착한다. 이들의 이런 관계는 그 자체로 대단한 갈등이며 또 갈등을 잉태하게 된다. 




우선 구일중은 아내 서인숙이 출산 휴식을 하고 있는 동안 자신의  가정부(간호사)를 건드려 임신을 시키는 데 이 아이가 바로 탁구이다. 김미순(전미선)의 임신 소식은 출산 휴식을 하고 돌아온 서인숙에게 곧 알려지게 되고 미순에게 낙태를 강요하지만 미순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탁구를 낳고 기르게 된다. 한편 서인숙은 비서실장인 한승재(정광모)와 불륜 관계로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게 되는데 바로 그 아이가 구마준이다. 정말이지 남아선호가 빗어놓은 대단한 비극이고 엇갈린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이 만들어 내는 갈등은 우리나라 자본주의의 변화적인 양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전개될 스토리도 거성가와 개성 상인의 마지막 후예인 팔봉선생 오두용(장항선)과의 경쟁을 예고하는 것이라면 자본주의에 대한 미래지향적인 성격까지도 생각케 하는 것이다. 이미 탁구와 구마준의 성격에도 이러한 대립구도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따뜻함과 차가움 같은 것. 앞서도 말했지만, 구일중은 자본주의의 냉소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닮아있다. 자본이란 그것 자체로는 중립적인 사물이다. 단지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차가워질 수도 따듯해질 수도 있다. 구일중이나 서인숙은 자본주의의 이러한 속물적인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홍여사의 경우는 전근대적인 사고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미덕과 악덕이 혼재해 있지만 대체로 남아선호나 가부장적인 의식, 여필종부들의 인습에 얽메여 있는 듯한 존재이다. 이런 성격은 자본주의를 대단히 위축시키는 작용을 한다. 자본을 가족주의, 권위주의, 가부장제의 태두리에 얽메이게 하면서 천민 자본주의를 형성하는 것이다. 
 


1회에서 엇갈리는 인간들의 운명을 보면서 너무 답답한 마음이었다. 동시에 시대의 답답함이 함께 몰려왔다. 정말 그 시대에는 그토록 답답했을까? 아들이 무엇이길래?  남아선호가 무엇이길래? 자본이 무엇이길래? 하는 괜한 생각들이 이어져 떠올랐다. 결국 이러한 답답함이란 지금 호흡하고 있는 이 시대의 답답함과도 통하지 않을까! 


그런데 1회를 보면서 놀랍게도 기시감을 느꼈는데, 바로 영화<하녀>였다. 사건이 전개되는 장소, 등장인물들이 하녀의 그것과 너무 흡사했다. 이것이 의도적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사고의 성격이 너무나 흡사한 것에 놀랐다. 즉 자본주의의 냉소적이고 차가운 비인간적인 느낌이 묘하게 비슷했다. 자본이 억압하는, 아니 짖밟는 <하녀>와 간호사로 상징되는 여성성은 또 얼마나 닮아 있는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화 <하녀> 를 보시기를 권한다.


위의 이미지 출처: http://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7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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