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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훈

신데렐라 언니, 정우와 효선이 사랑스럽다! 신데렐라 언니, 정우와 효선이 사랑스럽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커플에게는 세상은 천국이 된다. 사랑에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지옥이 된다. 사랑은 인간을 그렇게 상이한 처지에 놓이게 만든다. 사랑이란 대상이 있고 상대적일 수 밖에 없기에 상처가 생기고 비극이 생기는 것이다. 도 예외가 아니다. 기훈과 은조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그 이면에는 기훈과 은조로부터 사랑의 상처를 받고 떠나야 하는 존재들이 있다. 정우가 그렇고, 효선이 그렇다. 그 사랑 때문에 유일하게 대성참도가를 떠난 존재는 정우이다. 정우는 참 쿨했다. 효선도 마찬가지였다. 기훈을 형부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 둘의 마음의 심연에는 감당하기 힘든 상처가 도사리고 있다. 단지 그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참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더보기
신데렐라 언니, 결말이 실망스러운 이유? 신데렐라 언니, 실망스런 결말은 해피엔딩에 대한 지나친 집착 탓? 의 제작자들은 해피 엔딩에 어떤 강박을 가지고 있었을까? 글쓴이는 개인적으로 비극은 아니더라도 해피 엔딩을 등장인물들에게 그토록 집요하게 요구하는 그런 드라마를 기대하지 않았다. 솔직히 20회는 를 망친 듯한 느낌이다. 19회에서 송강숙이 돌아오는 장면에서부터 "어, 뭐 이리 송강숙이 쉽게 돌아오나!" 는 한탄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20회에서 은조가 떠 난후 다시 찾는 장면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왜 모든 등장인물들이 대성 참도가로 돌아오고 해피 엔딩으로 끝나야 하는지 도대체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글쓴이가 이전에 썼듯이(2010/05/22 - [드라마] - 신데렐라 언니, 송강숙은 효선에게 다시 돌아올까?) 송강숙이 돌아오기 위해서는 충격.. 더보기
신언니, 외로운 사람들끼리 사랑해야 할 이유 신데렐라언니, 외로운 사람들끼리 사랑해야 할 이유! 혼돈의 시간은 참 길었다. 대체의 드라마들이 그렇듯이 도 이제 갈등들이 해소되면서 질서가 잡혀가는 느낌이다. 아니 질서가 잡혀 간다기 보다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들이 가닥을 잡아가는 분위기다. 시청자들은 바다 위에서 흔들리는 손바닥만한 배를 지켜보듯이 그렇게 혼란스러운 인간의 마음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모두다 한결 같이 상처 입은 인간들이고, 그 상처 때문에 서로의 운명이 어긋나기도 하는 그런 존재들이었다. 이 어긋났던 운명들에 대해서 두서없이 언급해 볼까 한다. 우선, 부모와 자식의 어긋남이다. 이 어긋남의 절대적인 피해자 중에 한명이 은조이다. 은조의 내적인 상처가 가장 대표적이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어린 시절부터 은조는 송강숙에 의해 심적인 상처를 .. 더보기
신데렐라 언니, 송강숙은 효선에게 다시 돌아올까? 신데렐라 언니, 송강숙은 다시 돌아올까? 16회에서 송강숙이 떠나버렸다. 기차 역사에 홀로 남겨진 효선이 "엄마" 라고 부르짖으며 끝이 났다. 이 송강숙의 떠남은 그녀가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의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을 던져 주었다. 송강숙은 과연 돌아올까? 만약 송강숙이 돌아온다면 어떤 계기로 인해서 일까? 송강숙이 떠난 것은 드라마의 내적인 필연성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다. 필자가 이전의 포스트에서 송강숙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언급했었다. 송강숙이 떠난 것은 이 죽음이라는 추측과 깊은 관련이 있다. 죽음은 송강숙의 떠남의 강한 은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송강숙은 결코 개성도가에 남아 있을 수가 없다. 떠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송강숙이 단지 속물적인 인간으로 남아있다면 뻔뻔스럽게도 .. 더보기
신언니, 바보같은 효선의 복수 구대성을 닮았다? 신언니, 구대성이 살아난 바보같은 효선의 복수? 효선이 송강숙과 함께 어딘가로 떠났다. 바로 구대성을 괴롭힌 그래서 죽음의 한 이유에 속할 수 있는 장택근을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효선과 송강숙의 이 동행은 일종의 살풀이 같은 것이었다. 송강숙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도, 장택근을 원망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아빠 구대성을 위해 딸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 때문이었다. 바보 같은 아버지를 대신한 바보 같은 효선의 복수라고 해도 될 듯싶다. 진실의 확인이라고 해도 될 듯 싶다. 장택근을 만난 효선은 장택근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송강숙의 진실도 알게 되었다. 그랬기에 송강숙이 떠난 기차의 역사에서 목놓아 '엄마' 라고 부르며 통곡하는 것이다. 15, 16회에서 구대성의 일기를 읽.. 더보기
신언니, 애매모호한 존재들의 아름다움? 신데델라언니, 성찰하는 인간들의 아름다움? 등장인물의 관계들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복수와 용서, 사랑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드라마를 읽기도 간단치가 않다. 의미들이 생경스럽게 느껴질 정도이다.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들이 쉽게 잡혀지는 것들이 아니고 애매하다. 논리가 아니라 애매성,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 소용돌이 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치 앞을 예상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인간의 삶이란 감정이 충돌하고, 그 감정이 대체로 단호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더듬거리고, 상호적이기 때문이다. 는 바로 이런 삶의 애매성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우리의 삶에 있어 사랑도, 복수도, 용서도, 그렇게 단호한 것들이 있던가? 그 대표적인 존재가 구대성이다. 구대성이 애매한 존재이기에 동시에 .. 더보기
신데렐라언니, 은조가 아닌 송강숙의 죽음이 보인다? 신데렐라언니, 은조가 아닌 송강숙의 죽음이 보인다? 죽은 구대성의 일기장을 보고 넋을 놓고 있는 송강숙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읽는다. 그런데 그녀에게 어둠으로 몰려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이란 것이다. 진실한 사랑이란 것이다, 송강숙은 단 한 번도 사랑을 받지 못한 존재였다. 오직 생존을 위한 욕구만이 뱀의 독아처럼, 곤충의 더듬이처럼 돋아나 삶을 더듬으며 살아가는 존재였다. 송강숙에게는 오직 자신의 독아에 걸리는 존재만이, 자신의 더듬이에 느껴지는 그 표면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런 생존의 본능만이 도사리고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가 개인적으로 굳어진 것인지, 사회적인 방어의 일종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이런 송강숙은 거친 생존의 과정을 거쳐왔다. 생존이 본능인 그녀에게서 죽음을 읽는다.. 더보기
신데렐라언니, 송강숙에 드리워진 운명의 그림자? 신데렐라언니, 송강숙의 변화가 중요한 이유? 드라마 는 관계와 소통, 그리고 상처와 치유의 이야기이다. 상처라는 일면에 초점을 맞출 때, 상처의 근원에 송강숙이 자리 잡고 있다. 은조의 상처, 효선의 상처. 죽은 구대성의 상처, 이 모두가 송강숙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연이 아니다. 상처를 입히는 원인이 치유가 되면 상처가 아물게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 상식을 그대로 이 드라마에 적용을 해보면 송강숙의 정신이 치유가 되면 은조, 효선, 그리고 하늘에서의 구대성의 상처가 아물게 되는 것이다. 은조의 내면적인 모습은 이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부분이다. 소통이 부재하며 상처 받은 은조의 모습은 그 상처가 얼마나 절절하고 깊은 지를 알게 한다. 양심과 엄마라는 혈육 사이에서 내상을 입고 어쩔 줄 몰라 .. 더보기
신데렐라 언니, 송강숙은 과연 어떻게 변화할까? 신데렐라 언니, 송강숙은 과연 어떻게 변화할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해서, 송강숙은 구원 받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할 만큼 송강숙은 나쁜 인간이다. 구대성에게 접근한 것에서부터, 은조와 효선에게 다같이 내면적인 고통을 주고 있는 사실에 이르기까지 엄마라는 존재와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엄마라면 이럴 수 없는 것이다. 딸 은조에게 "돈이나 챙겨, 이년아!" 하는 속물적인 인간이 어떻게 엄마일 수가 있으며, 자신의 은인이라면 은인이랄 수 있는 구대성의 외동딸 효선을 어떻게 구박할 수가 있는가. 만약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이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 송강숙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가 드라마 의 주제들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즉 송강숙이 구원을 받을 것인가의 여부가 이 드라마를 보는 중요.. 더보기
신데렐라 언니, 선과 악의 경계에 선 은조? 신데렐라 언니, 선과 악의 경계에 선 은조? 11회는 그야말로 한 편의 소설같은 드라마를 본 느낌이다. 수작이다. 11회를 보면서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은조와 효선, 그리고 기훈의 눈물에, 그리고 송강숙의 표독스러움에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구대성의 이미지가 아른거리는 대성도가의 그 모습이 무엇보다도 감동적이었다. 죽은 구대성의 이미지가 살아있는 자들을 반응하게 하는 그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구대성의 이미지를 드라마 내내 읽었다고 해도 될 정도이다. 아무튼 팽팽한 긴장감으로 드라마를 보는 과정이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이었다. 참을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던 밤처럼이나. 선과 악은 떼어놓을 수가 없다. 그것들이 절대적인 기준이 없을 뿐 더러 그것을 판단.. 더보기
신언니, 은조에게 아빠로서 구대성의 진정한 의미는? 신데렐라 언니, 은조에게 아빠로서 구대성의 진정한 의미는? 구대성의 죽음은 참 가슴이 아프다. 이 구대성의 죽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드라마를 보는 시각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해석들 가운데 필자는 이전의 포스트에서 전통과 관련하여 이라고 좀 과장된 해석을 한 바 있다(신데렐라언니, 구대성의 죽음이 어이없는 자살인 이유?). 이걸 너무 아전인수격의 해석이라고 하더라도 비난은 달게 감수하겠다. 아무튼 이 전통의 죽음이란 관점에서 보면 구대성이 살아있던 때의 대성도가와 사후의 대성도가는 그 성격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전통의 죽음이라고 하였으니 대성도가는 더 이상 전통의 힘으로 운영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징후들은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은조이다. 은조는 미생물을 전.. 더보기
신데렐라 언니, 구대성의 죽음과 은조의 내면 갈등 요인들 신데렐라 언니, 구대성의 죽음과 은조의 내면 갈등 요인들 구대성의 죽음으로 대성도가의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마치 산을 하나 넘고 난 다음에 쉬려고 하니 바로 나타난 더 큰 산처럼이나 좀 더 격렬해지는 스토리 전개가 이어질 것 같다. 구대성의 죽음으로 어설픈 서론이 끝나고 질풍노도의 갈등들이 닥칠 듯한 느낌이다. 서론에서 추측하고 있던 모든 가능성들이 역전되고 뒤틀리는 예측불허의 상황을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스토리의 전개를 뻔히 예측할 수 있는 드라마와 달리 의 스토리 전개는 점점 더 갈등이 고조되면서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정극으로서 대단히 만족스러운 스토리의 전개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특히 은조에 대한 기대가 높다. 은조가 신데렐라 언니라면 이 드라마의 제목만큼 비중있게 평가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더보기
신데렐라언니, 구대성의 죽음이 어이없는 자살인 이유? 신데렐라언니, 전통을 밀어내는 현대의 어두운 그림자들? 대성도가의 저력의 원천이 무엇일까? 구대성이 일으킨 대성도가는 그야말로 전통의 결정체이다. 구대성의 막걸리에 대한 태도는 엄격했다. 1회에서인가 구대성이 잘 빗어지지 않은 술단지를 깨는 장면이 이를 입증한다. 술에 대한 고집이요 전통에 대한 애착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또한 구대성의 그러한 철학에 묵묵하게 따라온 직원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수십년을 대성도가와 함께 하면서 대성도가의 명성을 쌓아온 것이다. 비록 공정과정에 기계설비를 도입하고 마켓팅과 판매는 현대적인 방식으로 변화되었겠지만 드라마에서 생생하게 보아온 것처럼 누룩을 만들고 발효를 시키고 술을 만드는 과정은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누룩을 빗기 전에 고사를 지내는 장면은 막걸리에 얼마나.. 더보기
신데렐라 언니, 구대성의 죽음 VS 은조의 삶 신데렐라 언니, 구대성의 죽음과 은조의 내면 갈등 요인들 구대성의 죽음으로 대성도가의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마치 산을 하나 넘고 난 다음에 쉬려고 하니 바로 나타난 더 큰 산처럼이나 좀 더 격렬해지는 스토리 전개가 이어질 것 같다. 구대성의 죽음으로 어설픈 서론이 끝나고 질풍노도의 갈등들이 닥칠 듯한 느낌이다. 서론에서 추측하고 있던 모든 가능성들이 역전되고 뒤틀리는 예측불허의 상황을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스토리의 전개를 뻔히 예측할 수 있는 드라마와 달리 의 스토리 전개는 점점 더 갈등이 고조되면서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정극으로서 대단히 만족스러운 스토리의 전개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특히 은조에 대한 기대가 높다. 은조가 신데렐라 언니라면 이 드라마의 제목만큼 비중있게 평가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더보기
신데렐라 언니, 생물학적 엄마 vs 정신적인 아빠 신데렐라 언니, 생물학적 엄마와 정신적인 아빠 드라마 의 스토리 전개에 가장 큰 추동력을 제공하는 인물은 은조(문근영분)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 은조의 심리적인 갈등의 중심에 자신의 엄마인 송강숙(이미숙분)이 있다. 엄마란 어떤 사람인가? 예외없이 애정의 대상이다. 그런 애정의 대상인 엄마가 속물적인 존재일 때 그 정신적인 혼란은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은조가 사랑해야 할 엄마가 그저 속물적인 존재로 타인에게 피해는 물론이고 은조에게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야기 시킬때 이 애정과 분노 사이에서 느끼는 갈등이란 이루 말 할 수 없이 클 것이다. 은조가 선택한 것은 엄마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엄마라는 생물적인 관계를 의도적으로 끊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반인륜적이라 비난 받을 수도 있지만.. 더보기
<신데렐라 언니> 기훈과 정우, 은조의 선택은? 기훈과 정우, 은조의 선택은? 은조에게 기훈은 어떤 존재인가? 송강숙이 대성도가의 안방마님의 자리를 꿰차면서, 그 속물스럽고 혐오스런 삶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은조에게 손을 내밀던 존재가 아니었던가?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기훈의 "은조야, 은조야." 하는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취한 은조의 모습에서 애정에 목말라 하던 은조는 참으로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은조를 잡아주던 그 목소리. 은조에게는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을 위해주었던 남자였다. 애정에 목말라 하던 은조에게는 그렇게 다가오는 기훈이 과장된 감정을 일으키게 했을지도 모른다. 발효실에서 술독에 귀를 기울이며 누룩이 발효되는 소리를 함께 듣던 그 시간들이야 말로 은조에게는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기훈에게서 느꼈던 애정은 은조에게는 삶의 .. 더보기
신데렐라 언니, 문근영에게 김갑수가 아버지일 수 밖에 없는 이유? 신데렐라 언니, 생물학적 엄마와 정신적인 아빠 드라마 의 스토리 전개에 가장 큰 추동력을 제공하는 인물은 은조(문근영분)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 은조의 심리적인 갈등의 중심에 자신의 엄마인 송강숙(이미숙분)이 있다. 엄마란 어떤 사람인가? 예외없이 애정의 대상이다. 그런 애정의 대상인 엄마가 속물적인 존재일 때 그 정신적인 혼란은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은조가 사랑해야 할 엄마가 그저 속물적인 존재로 타인에게 피해는 물론이고 은조에게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야기 시킬때 이 애정과 분노 사이에서 느끼는 갈등이란 이루 말 할 수 없이 클 것이다. 은조가 선택한 것은 엄마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엄마라는 생물적인 관계를 의도적으로 끊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반인륜적이라 비난 받을 수도 있지만.. 더보기
신데렐라 언니, 은조의 공범의식과 분노? 신데렐라 언니, 은조의 공범의식과 묵인에 대한 분노?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어야 한다면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아마 남자와 여자로 나누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악한자와 선한자들로 무리하게 나누려고 할런지도 모르겠다. 자식과 부모는 어떤가? 나눈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다. 그건 어딘가 틈이 엿보이고 하나가 될 수 없을 것 같고 괜히 언짢아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나눌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아야 하고 그랬으면 좋겠다. 과학의 분석이나 분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하나를 있는 그대로 볼 수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너무나 불행하게도 하나인 것임에도 언제나 분리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 있다. 아이와 어른이다. 세상의 모든 어른들은 아이의 시기를 거친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어른들은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