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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선덕여왕

선덕여왕, 비담의 모습이 아직도 아른거리는 이유?



선덕여왕, 비담의 모습이 아직도 아른거리는 이유?

 

http://www.consumernews.co.kr/news/view.html?pid=180077&cate=ent&page=

드라마 <선덕여왕>이 지난주에 종영을 했다. 담배를 끊으면 금단 현상이 생기는 것처럼 한동안 비담의 얼굴이 떠올랐다. 급기야 월요일인 오늘은 비담이 되살아 난 느낌이 든다. 비담의 인상이 그만큼 컸던 까닭이다. 비담의 죽음과 함께 모든 갈등이 절정에 다다르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 까닭에 비담이 인상적인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비담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마지막회에 의해서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담이 갖는 매력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비담에 대한 미련이 많다. 선덕여왕과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크다. 염종에게 단호하지 못한 태도도 아쉽기만 하며, 권력에 휩쓸려 들어간 사실 자체도 그렇다. 결말에 대한 아쉬움에 대해 모든 것들에 감정을 들이대고 만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그러나 결말은 그 자체로 완결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그 자체도 완결이며, 아쉬움을 일으키는 모든 것들도 완결이다. 그러니 비담에게 작별의 손짓을 보내야 한다. 주저 주저 하다 늦어버렸다. 비담, 정말 매력적이었다.


비담과 함께한 시간들은 참 즐거웠다. 비담이라는 개릭터가 매력적이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비담의 캐릭터가 이 팍팍한 현실에 한 줄기 바람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권력 암투의 한 복판에서 신념보다는 감정의 순수함을 보여준 로맨티스트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권력 암투의 한 복판에서 불필요한 존재처럼 보였다. 더 나아가 드라마 <선덕여왕> 자체를 미지근한 사랑타령의 흙탕물로 빠지게 하는 듯도 했다. 그런데 그건 비담의 잘못은 아니다. 아무튼 비담은 무용지물 같은 인간이 되어 버렸다. 상상해 보라. 권력을 쟁취하는 혁명의 한 가운데서 사랑으로 징징거리는 작자를 말이다. 그런데 그 작자가 혁명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인간이라면! 참 난감한 일이 아닌가!




비담의 존재가 바로 이랬다. 비담은 존재할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존재인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도 존재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스러운 인물인 것이다. 이게 너무 좋았던 거다. 이게 너무 매력적이었던 거다. 사랑으로 징징거린 작자가 되어버린 비담이 참 좋았던 거다! 비담이 근엄하기만 하고, 철저하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기만 하며, 권모술수에 능수능란한 권력 지향의 인물이었다면 존경할 만한 인물은 되었을지언정 매력적인 인물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바보 같은 비담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장면은 슬프기도 했지만, 동시에 시원 했다. 속 시원하다. 한 바탕 칼춤을 춘 뒤 장렬하게 숨을 거두는 비담. 이 장면은 현대의 비극적인 로맨틱 영화 속 주인공의 이상과 꿈을 향한 발버둥과 무엇이 다를까? 정치판의 한 가운데서 진실을 부르짖은 위인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록 페스티벌의 격렬한 저항의 몸짓과 무엇이 다를까? 이렇게 비담의 몸짓은 필자가 처한 현실과 이어지며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아마 필자가 처한 현실 속에서도 이런 바보 같이 수순한 인간을 무의식적으로, 아니 의식적으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작가들의 무의식 속에도 이런 바램이 있었을까? 이 각박한 현실에서 만신창이가 되고 실패하고 비참해지고 놀림감이 되어도 이상을 위해, 꿈을 위해 멋있게 두 주먹을 날리며 죽어가는 사람 말이다. 현실 속에서 이성적으로는 우리가 배타적일 수밖에 없지만, 감성적으로는 우리가 기대하는 정반대의 사람 말이다. 돈키호테라고 하면 될까?


고질적인 질병인 모양이다. 나이 값을 하지 못하는 정신적인 미숙아인가 보다. 현실 속에서 환상의 물방울 놀이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환상의 물방울은 금방 터져버리는 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물방울 놀이가 참 재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