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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 이병헌의 베드신 그 수위가 어땠길래?




김태희, 이병헌의 베드신 그 수위가 어땠길래?




영화의 베드신과 TV 드라마의 베드신 수위는 어느 정도여야 할까? TV드라마의 베드신 수위가 영화에 비해 훨씬 낮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사실 작품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그 적용 수위가 달라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드라마와 영화는 그리 다른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수위를 결정짓는 것은 작품 외적인 이유 때문이다. 즉, 안방과 영화관이라는 공간의 차이 때문이다. 이 공간의 차이가 베드신의 수위 차이를 결정 짓는다. 안방은 여전히 우리나라에서는 신성한 공간이다. 가족이 상주하는 공간이며,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어야 하는 공간이다. 교훈적이고 교육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사실 안방에 대한 이러한 인식도 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서구식의 주거 형태가 정착하면서 안방보다는 거실이 중요한 공간이 되고 가정= 안방이라는 등식이 깨어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TV드라마는 안방의 전유물이며 가족이 함께 보는 상징처럼 되어있다. 영화 채널이나 외화 채널에서 솟아져 나오는 베드신은 노골적인 수위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안방의 TV드라마에서 베드신과 정사신과 섹스신이 나온다는 것은 아직 우리사회에서는 터부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김태희와 이병헌이 베드신을 연출했다고 한다. 첫 회부터 키스신과 발목 애무신이 있었고 이어서 프렌치 키스와 베드신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항로를 이어가고 있다. 애정의 정도를 표현하다보면 부득이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베드신이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고 편집이 되었다고 한다. 작가나 연출가의 입장에서는 이런 편집이 예술성을 망치는 것으로 작용할 수 있다. 상당한 불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예술성을 강조한답시고 또는 흥행 수입을 올리려는 목적으로 안방의 TV드라마에서 노골적인(?) 베드신을 노출하다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러한 조치가 정당하다는 판단이 든다. 안방의 TV드라마의 경우는 예술성이나 상업성과 함께 공공성도 함께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공성이라고 해서 뭐 거창한 것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대에 가족용으로 자라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에는 몇 가지 성찰의 문제가 따른다고 할 수 있다. 가족의 결속이나 가정의 분위기가 진보적이어야 하는가, 또는 보수적이어야 하는 가의 문제가 그렇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진보적이어야 하는가, 보수적이어야 하는가? 예를들면, 부모 자식간의 위계적인 권위의 관계가 바람직한지, 아니면 평등에 입각한 친구같은 관계가 바람직한 지는 개인들의 태도와 가치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하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그 기본적인 선은 지켜져야 한다고 본다. 그 기본적인 선이란 부모의 권위와 자식의 도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서구적인 사고나 생활방식이 침범하지 말아야 하는 마지노선이라고 본다. 부모의 어께위에 자식이 손을 올리면 어깨동무를 하는 식 말이다. 부모 앞에서 애인과 진한 사랑의 키스 같은 것을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이 선이 무너지는 소리가 도처에서 들리기도 한다. 아무튼 이런 의미에서 그 관계의 근간을 이루는 프레임은 보수적인 성격이 강해야 한다고 본다. 진정성과 진실성이 있다면 보수고 진보고 나쁜 것이 결코 아니라고 본다. 진정한 보수도 진보도 아니면서 이런 단어로 장식하는 거시 문제가 아닐까? 만약 이런 최소한의 보수성(전통) 마저 무너진다면 가정과 가족은 무너지기 때문이다. 예를들다 보니 이 지경에까지 오고 말았다.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articleid=20091022121030128e1&linkid=4&newssetid=1352


김태희와 이병헌의 베드신의 수위가 어떠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사진과 동영상으로 보면 그 수위가 TV 드라마용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보는 TV 드라마는 극장용 영화와는 성격이 다르다. 옷을 벗고 있고, 섹스의 체위까지 진행되는 장면들이 안방의 TV 드라마에까지 내보내려고 했는지는 쉽게 납득히 가지 않는다, 아마도 TV 영화나 그외 다소 노골적인 프로그램의 추세에 편승했다고도 볼 수 있다. 

베드신을 허용하지 않은 것은 잘 했다고 판단한다.  앞서 말한 이유 때문이다. 보수적이어야 좋을 때가 있는 반면에 진보적이어야 좋을 때도 있다. 이 둘을 뒤섞어 놓을 때가 좋을때도 있다. 무너지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무너뜨리는 것이 바람직 할 때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너져서는 안되는 때도 있고, 무너뜨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 때도 있다. 이번의 <아이리스> 베드신이 바로 이런 때가 아니었는가 생각된다.안방의 TV 드라마는 여전히 가족이 함께 하는 공간이므로. 베드신을 보려면 영화관이나 늦은 밤 TV의 영화 채널을 이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