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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선 아나운서의 자살과 병든 사회


송지선 아나운서가 투신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참 슬픈 일이다. 생을 가진 모든 생물체는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은 피해야할 죽음의 방식이다. 그런데 최근 이런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수가 세계 1위라고 하니 정말 놀랍기만 하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극단적인 자살을 선택하게 하는 것일까?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처절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연예계만 하더라도 자살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최진실, 최진영 남매, 안재환, 정다빈, 장자연, 박용하 등 많은 연예인들이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이들의 자살을 통해 연예인이란 화려란 겉모습과는 달리 내면적으로는 고통스런 삶이란 사실을 확인했다. 이유는 다 다르지만 인기나 대중의 사랑 같은 것이 진정한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연계인이라는 타이틀과 인기는 고작 외면을 장식하는 부유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인간이란 어떤 사회적인 수식어를 달고 있던 기본적으로 외롭고 고독한 존재이다. 내면을 진정으로 위로해주고 쓰다듬어 주는 사람이 없다면 어떤 사회적인 수식을 달고 있던 병들어 갈 수 밖에 없다. 연예인들은 외면적인 화려함 때문에 그 내면을 이해받기가 힘들 것이다. 늦게야 그들에게 어떤 불행이 닥쳤을 때 대중은 그들의 내면을 보려는 노력을 하기도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이해를 목말라 하던 그들은 이미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더 이상 아니기 때문이다. 

송지선 아나운서는 연예인은 아니었지만 아나운서로 대중의 조명을 받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극단적인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은 극복할 수 없는 고독의 깊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녀는 참 쿨해 보였다. 그랬기에 그녀의 자살은 더욱 슬프다. 누군가를 사랑했다고 자존심 따위 접어두고, 그래도 아름다웠을 그 시간을 떠올렸다. 그런데 상대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해버렸으니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었을 것이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진실을 자살로 보여주고자 한 것일테다. 사랑 때문에 자살을 선택한 송지선 아나운서는 참 순수한 여성임이 틀림없다. 




자살 1위의 대한민국은 병든 대한민국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현상들 중에 하나이다. 인터넷도 한 몫을 하고 있을 것 같고, 교육도 그럴 것 같으며, 가진자들의 위선도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삭막한 사회의 경쟁이던, 경제이던, 교육의 문제이던 수많은 사람들을 자살로 밀어내는 병든 현실을 빨리 치료해야 한다. 송지선 아나운서의 자살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인간과 인간이 좀 더 섬세하게 서로를 배려하는 우리 사회 관계의 문화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자살은 피해야 한다. 병은 고치면 된다. 가슴에 손을 대어보면 생의 본능인 심장의 박동소리를 느끼게 된다. 심장이 뛰는 강렬한 생의 본능적인 현상을 거부하는 것은 죄악에 가깝다. 어떤 괴로움이 있어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남녀관계란 것도 그렇다. 남녀관계의 결별이 당장은 죽을 것 같은 괴로움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무뎌지고 멀어져버린다. 이 세상에 절대성을 갖는 여자나 남자는 없다. 사랑에 빠질 때는 그런 착시이 일어나지만 착시는 착시일 뿐이다. 송지선 아나운서도 좀 더 견뎌내고 시간에 자신을 맡겼더라면 어땠을까 그저 안타까운 마음이다.
 

아무튼 송지선 아나운서 하늘나라에서는 부디 행복했으면 한다.